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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지혜 Aug 27. 2023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는
달콤한 거짓말

(14).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Z는 민들레꽃을 닮은 사람이었다. 척박한 아스팔트 사이나 높은 언덕 옆 바위틈에서도 얼마든지 피어날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을 가진 사람, 그게 바로 Z였다. 그녀와의 인연은 아주 재미난 일화로 시작됐다. K는 대학원 때, 기숙사에서 나와 인근의 연립주택 형태의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학교부터 시작해서 그 일대는 모두 우범지대라 낮이나 심지어 아침에도 큰 슈퍼마켓과 버스 정류장에 마약이나 술에 취한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것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나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낯선 남자가 쫓아와서 치근덕거리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안전하고 살기 좋은 런던 서쪽에 살던 친구 하나는 K의 동네에 왔다가 무섭다고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듯 가버린 적도 있을 정도다. 그래도 사람은 어디에나 적응하고 살면 다 살기 마련이라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풍경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이상한 사람을 봐도 대응하는 법이 생긴 것은 기본이고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을지도 알게 됐다. 하지만 아무리 대응하는 법을 알게 되더라도 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언제부터 인가 노숙자가 1층에 자기 짐을 아예 내려놓고 누워서 자고 있었다. 아직 날이 따뜻하기 전이라 추워서 갈 곳을 찾다가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보통 공동 주택은 입구가 닫혀 있는데 워낙 낡은 연립이라 그런지 1층 중앙 입구가 닫혀 있지 않았다. 노숙자에게는 이곳이 그저 천국이었다. 그냥 거기서 가만히 있기만 하면 좋은데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행패까지 부렸다. 당연히 혼자 사는 K로서는 그곳을 지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다가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학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 공동 현관문을 여는데 노숙자가 K한테 말을 걸었다. 무서웠다.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따라오면 어떡하지, 다시 와서 행패를 부리면 어떡하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다행히 집까지 따라오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무서운 생각이 계속 들었고 고민을 하다가 바로 앞집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면 어떨까?' 어디서 용기가 생긴 건지 K는 저녁을 먹고 앞집 문을 두들겼다.                 


           “저기요. 앞집 사는 사람인데요. 계신가요.”    

           

        몇 번을 문을 두들겼을까? 안에서 사람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동양인 커플이었다. 그리고 말을 하는데 뭔가 한국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국사람 맞죠?”

           “네 맞아요.”

           “어머 여기서 한국 사람을 만나네요.”   

            

        여기 산지 1년이 넘도록 바로 앞집에 한국인 커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니. 그 커플은 K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저녁 아직 안 드셨으면 들어오셔서 같이 드시죠?”      

    

        Z언니와 U는 K에게 따뜻한 밥을 대접했고 와인도 한잔 곁들여 마셨다. 알고 보니 6살 연상 연하 커플이었고,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동거 중이었다. U는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혼자 사는 K에게 뭔가 문제라도 생기면 망설임 없이 와서 그 일을 해결해 줬다. 특히 U는 기계를 잘 다뤄서 컴퓨터가 고장 나면 컴퓨터 수리공보다 컴퓨터를 더 잘 고쳐줬고 전등이나 갖가지 여자들이 다음 힘든 일들은 앞장서서 도와줬다. 하지만 아무래도 남자다 보니 가깝게 지내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반면 Z언니와는 금세 친해졌다. 언니는 참 살갑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쩌다가 K가 힘든 일이 있으면 눈물을 말끔히 가실 수 있게 해 줬고, 혹시라도 힘들어서 밥을 안 먹을 까봐 따뜻한 밥을 지어줬다. 두 사람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고, 술을 전혀 모르던 K에게 신기한 술도 많이 맛볼 수 있게 해 줬다. 하지만 이 커플에게도 말 못 하는 비밀(?) 이 있었다.  

    

        Z언니의 비밀을 알게 된 건, 이들 커플을 안 지 1년이 채 안 됐을 때다. 언니 커플과 K는 밥을 먹으러 한인 식당에 갔다. 음식이 나오고 맛있게 먹으려는데 경찰들이 들어왔다. Z언니는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놨다. 언니 표정이 굳는 것을 봤다. 경찰들은 주인에게 뭐라고 얘길 하더니 주방 쪽으로 들이닥쳐서 필리핀 직원 두 명을 연행해 갔다. 경찰들이 나갈 때까지 언니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언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U는 한숨만 쉬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언니는 자신은 여권이 없다고 했다. 이해가 잘 안 갔다. 대학 준비과정부터 대학원까지 직장에서 시간제근무로 일하면서 일과 공부를 동시에 병행할 만큼 성실한 언니가 왜 여권이 없을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대답하기를 꺼려하는 언니를 보면서 K도 그냥 뭔가 사연이 있나 보다 하고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언니의 눈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왜 여권이 없는지 얘기해 줄 수 있어 언니?”     

           “그게 말이야.”               


        언니의 대답은 이러했다. 자신의 부주의로 여권을 잃어버렸는데 대사관에 신고를 한다는 게 어떻게 하다 보니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10년이 지나버렸다. 아무리 들어도 영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권을 잃어버렸는데 왜 10년이 되도록 그걸 놔둔 거지? 그리고 비자도 없이 어떻게 회사도 다니고 학교도 다닐 수가 있지? 이해가 안 가는 거 투서이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언니의 비밀은 뭔가 금기된 얘기 같았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몇 번 물어보고 싶었지만 언니가 뭔가 폭탄선언 같은 걸 할 것 같아서 물어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언니가 갑자기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혹시나 하고 이유를 물어보니 예상했던 대로 비자와 여권 때문이었다.                

           “정부에서 무비자 무여권인 사람을 색출해서 내쫓는데.”        

       

        정부에서 집중 단속 기간을 1년 정도 갖기로 했는데 무비자 무여권으로 11년, 만 10년을 버티면 나라에서 규제를 면해주고 영주권을 준다고 했다. 언니는 이제 2년만 버티면 그 자격을 딸 수 있어서 단속에 안 걸려야 한다고 했다. 그 이후로 언니는 바깥 외출을 삼가고, K를 만나도 경찰들이 잘 안 다니는 곳을 찾아서 만나야만 했다.               


           “점을 봤는데 내가 여길 뜬 운세는 아니라네.”         

     

      도대체 무슨 비밀을 갖고 있을까. 무엇 때문에 이 먼 영국 땅에서 경찰들까지 피하면서까지 도망 다닐까. 예전에 언니가 영국에 온 초기에 길거리 꽃장수부터 식당 아르바이트며 별의별 일들을 다 경험하고 겪었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지만 K가 모르는 무언가가 분명 있어 보였다. U도 이 일에 대해서는 뭔가 답답한 속내가 있는지 얘기가 나올 때마다 말없이 담배만 피웠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여권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뺏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여권만 뺏긴 거고 신변의 위협까지 받은 거라면 충분히 이렇게 도망 다닌다는 것이 말이 된다.    

 

        이런 언니와 비교하면 K는 너무 평온하고 안전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기에 함께 있으면 뭔가 죄를 짓는 것처럼 미안했다. 영국 점쟁이 말이 효험이 있던 건지 언니는 2년 동안의 도망자 생활을 마치고 변호사를 사서 무사히 영주권을 땄다. 그리고 U와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언니가 아이를 낳았을 무렵 K도 결혼을 한 상태였고 전남편인 G와 언니네 집에 놀러 갔다. 언니는 쫓겨 다닐 때의 초췌하고 어두운 얼굴 대신 안정되고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예전에는 꽤 살이 쪘었는데 아기 키우는 게 힘들어서 그런지 살도 많이 빠져 있었다. 언니는 다시 만난 K를 보면서 무척 반가워했고 자신의 안정된 생활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렇게 언니의 안정된 삶을 본 뒤, 그것의 언니의 해피엔딩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언니 얘기에는 반전이 있었다. K는 박사공부를 하느라 몇 년 동안 언니를 만나지 못했고 가끔 안부 전화만 하는 게 다였다. 그런데 이혼을 하고, 살고 있던 집에서도 나오고, 남은 몇 달을 지낼 곳을 찾던 때였다. 사정을 들은 언니가 흔쾌히 자기 집에 있는 방을 빌려줄 테니까 와서 마음껏 지내고 공부도 마치라고 했다. 화장실까지 딸려 있고 안방과 거리도 있어서 예민한 K가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는 게 언니 설명이다. K는 고마운 마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살림살이들을 언니에게 주고 언니네 집에서 머물게 됐다. 그땐 잘 몰랐다. 언니네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비밀의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란 것을.     


        Z네로 이사를 간 첫 한 달은 큰 문제없이 평온하게 지냈다. 다만 언니가 죽어도 현관 열쇠를 만들어주지 않아서 K는 바깥출입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걸 빼고는 아무 문제없이 공부와 논문 마무리에 몰두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적어도 언니가 이런 얘길 하기 전까지.      

          

           “내가 행복해 보이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

          “그냥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이나 궁금해서.”

        “당연히 행복해 보이죠. 다 가졌잖아요 이제. 멋진 집도 생겼고, 토끼 같은 아들도 생겼고, 안정되고 좋은 직장도 다니고, 서방님도 있고. 난 언니가 부럽구먼.

           “그래? 그렇게 보여?”

           “응.”

           “네가 겉모습만 봐서 그래. U는 불만이 많아.”

           “불만이요? 웬 불만?”

           “너처럼 요리 잘하는 여자를 좋아해. 다소곳하고 여성스러운 여자 말이야.”

           “갑자기 뚱딴지 같이 무슨 소리야.”

           “아니 진짜, 너 같은 여자랑 결혼하고 싶어 했어.”

           “이상한 말 좀 그만해요. 언니같이 괜찮은 부인이 어딨 다고.”         

      

        사실 K는 자신이 먹으려고 한 음식이지만, 아이도 있는 언니네 음식을 나눠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 항상 넉넉히 음식을 했다. 근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언니는 할 줄 모르는 많은 음식들을 K가 해주니까 그걸 보고 U가 몇 마디 한 눈치였다. 하지만 이것보다 K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주말이면 Z언니는 직장에 나가지만 U는 집에서 쉬었다. 여느 때처럼 아이와 U가 먹을 음식을 쟁반에 담아서 부엌에 갔다 줬다.                


           “잠깐 시간 좀 되세요?”

           “네? 무슨….”

           “그냥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커피 한잔 하실래요?”               


        U는 믹스커피 두 잔을 타서 식탁에 와서 앉았다.              

 

           “언니가 뭐라고 안 해요?”

           “네? 무슨 말이요?”

           “제 얘기요.”

           “늘 하죠. 근데 뭐 별 얘기는 안 해요.”

           “이혼 왜 하신 건지 물어봐도 돼요?

          “복잡해요. 한 가지로 말하기 힘들 만큼.”

           “네 맞아요. 복잡하죠?”

           “그런 얘긴 왜 하세요?”

           “만약 에요. 만약에 남편이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하면 어떠셨을 거 같아요?”

           “다른 여자가 생기면… 네? 혹시 다른 여자가 생긴 거 에요? 맞아요?”

           “휴…. 언니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별거 아니에요. 그냥 물어보는 거니까.”

           “별거 아니라뇨. 말을 해주셔야죠. 별거 맞는데요."

           “저도 괴로워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U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백화점 물류 센터에서 일하는 U밑에 중국인 신참직원이 들어왔다. 일을 잘 가르쳐주라는 선임의 말에 U는 친절하게 일을 가르쳐줬다. 감사하다며 중국인 직원은 U에게 커피를 종종 샀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날씨가 더워도 그 직원은 절대 반팔 옷을 입지 않는다는 거다. U는 속으로 문신을 많이 새겨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커피를 두세 번 마시다 보니 둘은 개인적인 얘기를 하게 됐다. 알고 보니 남편에게 끊임없는 구타를 당해서 도망 나와 있는 상태라고 했다. 그 직원은 팔을 거둬 부쳐 상처를 보여줬고 U는 충격을 받았다. 여린 몸에 착한 눈망울을 가진 이 여자가 때릴 곳이 어디가 있다고 때린다는 건지. 화가 나는데 그 직원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테이블 앞에 놓인 냅킨을 그녀에게 건네줬지만 그녀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보다 못해 U는 그녀의 옆자리로 가서 그녀를 꼭 안아줬다. 그 뒤 그 여직원은 U에게 같이 점심도 먹자고 했고 커피도 마시자고 했고 퇴근도 같이 하길 바랐다. U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녀와 함께 이 모든 걸 함께 하고 있었다. U는 그녀가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집에 가면 듣는 아내의 잔소리를 잊어버리고 달콤하고 아름다운 이 젊은 여인의 미소를 계속 보고 싶었다. 어느새 둘은 연인이 됐다. 시작은 이렇게 했지만 분명 끝을 내야 하는 관계였다. 하지만 관계는 맺는 것보다 끊는 것이 힘들기에 U는 매일 고민을 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단다.                


           “이건 아니잖아요. 언제까지 속이실 수 없잖아요.”

           “알아요. 그리고 날 이해 못 할 거란 것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이해하신다고요? 날?”

           “사람을 좋아하는 게 의지로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끝내셔야죠.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때까지만 언니한텐 비밀로 해주세요."               


        U의 비밀을 들은 뒤로, K는 Z언니를 볼 때마다 죄지은 사람이 된 것 마냥 기분이 영 그랬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얼마 후 Z언니는 K를 붙들고 이런 말을 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뭐라고?!”               


        드디어 Z언니가 뭔가 알아낸 눈치였다. K는 U에게 들은 얘기를 Z언니에게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사이 언니는 심각하게 얘기를 이어 나갔다. 그녀는 U의 핸드폰을 몰래 뒤져봤다고 했다. 그리고 U가 어떤 중국인 여직원하고 나눈 메시지들을 봤다. 그리고 몇 번이나 늦은 퇴근과 회식이 의심이 간다고. 중간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서 입장이 난처해진 K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언니의 얘길 들어줄 수밖에. 결국 언니의 의심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고 급기야 언니는 U를 미행한다면서 K에게 아이를 맡기고 나갔다. ‘이제 어쩌지’ K는 방안을 서성거리면서 고민하다가 결국 U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언니가 미행하러 갔어요."               


그러고 얼마 후 U를 미행 나간 언니는 허탈하게 돌아와서는         

       

            “어디 있는지 봤는데 그 여자랑 다른 사람도 있더라고.”        

       

        U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 옳은 일이었는지 반문해 보기도 했으나 K는 이 두 사람의 관계에 평화를 지켜주고 싶었다. 자기 말이 맞지 않냐면서 몹시 슬퍼하는 언니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다. 그저 제발 U의 바람이 한철 피고 지는 꽃처럼 지나가길 바랐고, 언니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K의 이런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언니는 점점 더 상처받고 힘들어했고 몸은 극대로 야위어 갔다. U는 K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죄인처럼 지나갔다. 언니와 U가 같이 있을 때 냉랭한 기운을 남겼다. K는 입장이 너무 난처했다. 모두 말해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이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도 K는 다행히 무사히 논문을 마쳤다.        

       

            “부탁인데 언니 상처 주지 말아 주세요.”               


        한국으로 떠나면서 K는 U에게 부탁했다. U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 잘될 줄 알았다. 그의 바람도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부터였다.      

 언니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아주 살갑게 앞으로도 영원히 볼 사람인 것처럼 대했다. 아니 솔직히 집에 돌아와서 얼마 후까지만 해도 이런 좋은 관계는 지속됐고 언니와 U에 대한 걱정과 마음의 짐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언니는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렸다. 차단을 했는지 톡도 받지 않았고 당연히 음성통화도 받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졸업식을 하러 부모님과 영국에 갔을 때 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연락을 했지만  “누구시냐”며 모르는 사람 취급하고 황급히 전화를 끊어버렸고 다시 전화를 했을 땐 전화기를 끈 상태였다. 그러고 나서 며칠이 지났을까 톡으로 메시지가 왔다.               


           “미안해.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 그동안 정말 고마웠고 앞으로 네가 살아가는 길에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언니와의 이별은 충격 자체였다. 이별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말없는 몸짓이 된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였는지도 모를 두 사람 사이의 이별. 슬퍼할 사이도 없이 언니는 K를 떠났다. 주변 친구들로부터 이들이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Z언니의 문자가 오고 나서 얼마 후에 벌어진 일이다. ‘언니는 U와 나눈 비밀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걸까?” “U는 결국 그 여자에게 가버린 걸까” 무수히 많은 비밀들을 남긴 채, Z는 이렇게 내 삶에서 멀어졌다.    

   

           가끔 Z와 마시던 맛있는 커피 한잔이 떠오른다. 순수예술을 하던 언니는 커피 한잔을 마셔도 왠지 멋졌고, 그 분위기에 K도 흠뻑 젖어서 같이 몇 시간이고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함께 다니던 극장가와 미술관. 그리고 수없이 나눴던 서로의 꿈과 사랑 얘기들. 언니는 이 모든 것을 덮어버릴 수 있을 만큼 또 다른 큰 비밀이 있었던 걸까. 언니가 가진 비밀들을 다 알지 못한다. 12년 동안 알고 지내면서 K는 언니를 많이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K가 알던 언니는 진짜 언니 모습의 반도 안 됐던 것 같다. 살면서 다시 언니를 만날 일이 있을까. 만약 다시 만난다면 언니는 무슨 얘길 들려줄까? 언니의 비밀은 이제 다 해결됐을까? 만약 언니의 비밀을 알려고 들지 않고 그저 모른 척 지나갔다면 언니는 K와의 인연을 끊지 않았을까? 비밀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언니가 생각난다. 우리 모두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을 함께 공유하느냐 아니면 눈과 귀를 막고 보지도 듣지도 않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길을 걷다가 민들레꽃을 보면 Z언니가 생각난다. 민들레는 그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민들레꽃의 강한 생명력 때문에 흉물로 여겨질 때도 있지만 반대로 그 질긴 생명력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 든 민들레꽃을 만날 수 있다. 어디에 있어도 일정한 크기의 일정한 꽃잎을 쭉 뻗어 피고 지는 민들레꽃에게도 긴 생명력 뒤로 우리가 모르는 그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어떤 힘든 일이 외부에서 벌어져도 민들레처럼 그곳에 강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있을 것만 같은 Z언니. 오늘은 유난히 언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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