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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지혜 Aug 24. 2023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는
달콤한 거짓말

(11). 불광동 블루스!


        

     K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스무 살까지 불광동에 살았다. 집까지 가는 길은 간단하지 않았다. 개발이 되지 않은 서울 변두리. K가 어렸을 때는 불광동은 버스도 잘 다니지 않았다. 지하철이 생기면서 집에 가는 길이 조금 편해졌지만, 아주 어렸을 때는 엄마가 동생을 등에 업고, 다른 한 손으론 K 손을 잡고, 집에서 20분 거리인 시장까지 걸어 다니셨다고 한다. 지하철 3호선이 생기면서 구파발역 바로 전 역인 연신내역이 집으로 가는 첫 번째 도착지점이 됐다. 연신내역에서 내리면 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로 세정거장을 가서 내리면 비로소 불광동이 나온다. 버스에서 내리면 이제부터는 걸어야 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10분은 걸어야 집이 나오는데 복병은 경사진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는 거다. 겨울에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빙판길이 돼서 언덕을 오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연탄재를 여기저기 뿌려 놓고도 언덕을 올라가다가 넘어질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으니까. 그렇게 언덕을 한참 올라가면 작은 중학교 건물이 있고, 바로 맞은편, 중학교 앞 유일한 문방구가 있다. 문방구 안집. 그게 바로 K의 집이었다. K의 집은 문방구와 서로 이어졌는데, 지하방과 K의 집 방 한 개, 이렇게 방 두 개와 문방구를 세줬다. 나중에 K가 중학생이 된 다음에는 방 한 개를 K가 쓰게 돼서 문방구집은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함께 살았다.  문방구만 해서는 도저히 생계를 잇기 힘들었던 문방구집 아저씨는 여름에는 하드를 팔았고, 겨울이면 연탄난로에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마가린에 구운 쥐포를 팔았다. 별것도 아닌 간식거리인데도 지금도 겨울이면 마가린 냄새나는 쥐포가 그리워지곤 한다. 


            K의 집은 마당이 제법 규모가 있었는데 각종 나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하얀 목련나무가 크게 있었다. 목련나무 오른쪽에는 화단이 있었는데, 포도나무, 앵두나무, 대추나무와 같은 과실나무가 있었고, 장미, 철쭉, 라일락까지 마당 가득 꽃과 나무들로 가득했다. 마당 한가운데는 수돗가가 있었다. 엄마는 여기서 김장 준비도 하시고, 걸레도 빠시고, 마당에 있는 꽃과 나무에 물을 주셨다. K는 수돗가 물을 가지고 동생과 화단에 뿌리는 장난을 치다가 들켜서 꾸중을 들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대문 위에는 여느 집처럼 장독대가 있었고, 장독대에 올라가기 위해 사다리를 놓아두었다. 이 대문 위는 K만의 아지트였다. 특히 달이 환하게 뜬 날이면 장독대가 있는 대문 위로 올라갔다. 장독대 옆에 앉아서 별과 달을 보고 있으면 마치 우주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상상을 하곤 했다. 어디 그뿐이랴. 커다란 목련나무에는 K가 올라타서 앉아도 될 만큼 큰 가지가 있어서, 가끔 가지 위에 앉아 나무 꼭대기에 목련 꽃을 봤다. 길고 동그란 꽃잎은 신부의 백색 드레스 같았다.      


           하지만 아름다운 꿈만 꿀 수 있던 건 아니었다. 30년이 넘게 오래된 주택이라 집 천장에는 유난히 길고양이들이 많이 들어와서 거주하고 있었다. 들어와서 그냥 조용히 살면 좋으련만, 암컷 고양이가 발정이라도 난다 싶을 때면 아기 울음소리 같은 유쾌하지 않은 소리를 내면서 집 천장을 뛰어다녔다. 그 뒤로 수많은 수컷 고양이가 암컷 고양이를 차지하려고 더 앙칼지게 울면서 천장을 운동장 마냥 뛰어다녔다. 밤마다 벌어지는 고양이들의 잔치(?)에 결국 엄마는 집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흙과 돌로 막으셨다. 하지만 고양이들은 어떻게 알고 지붕의 반대쪽을 뚫고 의기양양하게 다시 지붕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얼마 후면 새끼들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몇 번 지붕입구를 막아보던 엄마는 결국 고양이들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이런 고양이에게 천적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개장수였다. 낡은 자전거 뒤에 녹이 슨 쇠창살 케이지를 검정 고무줄로 칭칭 감고 확성기를 들고 다니던 아저씨는 이빨이 반쯤 빠졌다. 개를 사고 난 뒤 돈을 건네면서 씩 웃을 때면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앞니가 차량 맞게 나와 있었다.      


           “개 삽니다. 고양이 삽니다. 개나 고양이 삽니다."     


        개장수는 사람들에게 개나 고양이를 사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는 죄 없이 길거리를 방황하는 개나 고양이를 잡아갔다. 그래서 때로는 주인이 있는 개를 잡아갔다가 주인이 뒤따라와서 따지고 다시 돌려준 것도 봤다. 어릴 때는 이 개장수의 추임새가 웃겨서 괜히 따라 해 본 적도 많다. 불쌍한 동물을 잡아가는 이 슬픈 드라마를 코미디로 받아서 농을 건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끔찍함 그 자체인데, 어릴 때는 끔찍함보다 재밌다 는 생각을 했으니 얼마나 무지했나 싶다. 귓가에 들리던 흥미로운 소리는 개장수만이 아니었다. 겨울이면 찹쌀떡, 메밀묵 장사가 창가 바로 아래서           


           “찹쌀~떡! 메밀~묵”          


을 노래하면서 군침 돌게 했고, 군고구마 장수는 구수하고 달콤한 고구마를 들고      


        “군~고구마~뜨끈뜨끈한 군고구마.”       


        라고 고구마장수가 고구마를 팔며 긴 겨울밤을 유혹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요일 아침엔 콩나물 장수가 콩나물을 팔러 돌아다녔다. 월요일에는 두부 장수였는데, 두부장수의 딸랑거리는 종소리는 유난히 듣기가 좋았다. 두부와 저 청량한 종소리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두부 장수는 커다란 양동이 같은 곳에 두부와 물을 넣고 리어카에 실은 채 끌고 다녔다. 두부한모를 달라고 하면 두부를 국자로 퍼서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주곤 했다.      

        별다른 놀이시설이 없었던 불광동 아이들은 집에 돌아와 가방만 던지고 동네 공터로 모두 모였다. 그리고 '땅따먹기'와 '다방구',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재밌는 놀이를 번갈아 가면서 했다. 요즘처럼 미디어와 SNS에 빠져 지내기는커녕 텔레비전조차 부모님 허락이 있어야 한 시간 정도 볼 수 있었고, 친구랑 만날 때도 시간보다는      


           “밥 먹고 만나자.”     

           “이따가 만나자.”          


이 말 하나면 끝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늦게 온 친구를 기다리는 건 다반사였다.     

 

           B는 K의 오랜 친구 중 하나였다. K의 집이 동네 어귀 첫 번째 집이라면 B네 집은 동네의 제일 끝자락에 있는 이층집이었다. B는 K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이사를 왔다. 동네에서 몇 안 되는 이층집인 그 집엔 B 이전엔 D 가족이 살고 있었다. D는 개천절에 태어나서 부모님이 이름을 D라고 지었다고 했다. D의 집에는 일하는 언니가 있었다. 어쩌다가 집에 놀러 가면 일하는 언니가 마늘을 까고 있었다. K는 그런 광경이 신기했다.  불광동에 사는 애들은 대부분 옷을 물려 입거나 저렴한 시장표 옷을 입었다. 하지만 D는 달랐다. 옷도 비싼 메이커만 입었다. 늘 곱게 빗은 양머리를 예쁘게 묶고 메이커 원피스를 입은 모습은 공주님 같았다. K는 새카맣게 그을린 피부에 엄마가 얻어온 헌 옷을 입고 무릎은 어디서 놀다 까졌는지 모르겠지만 늘 빨갛게 흉터가 있었다. 선머슴 같은 K에게 D의 희고 고운 예쁜 얼굴은 딴 세계사람 같았다. D네 가족이 이사를 간 건 88 올림픽이 막 끝나고 나서다. 올림픽 선수촌을 아파트로 개조해서 일반인들에게 분양했는데 D는 그곳으로 이사를 갔다. D가 이사를 가던 날 동네 사람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B는 D네 가족이 이사를 가고 일주일이 채 안 돼서 이사를 왔다. B는 키는 작았지만 꽤 잘생긴 편이어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대기업에서 자동판매기 업을 하는 B네 집도 D네 만큼이나 부유했다. B네 엄마는 K엄마랑 어느새 가까워지셨고 자식들을 같이 과외공부를 시키기로 두 분이서 약속하셨다. 말이 과외지 공부를 마치고 나면 양쪽 엄마들이 맛난 음식으로 밥상을 거하게 차려내셨고 요리 대회를 방불케 했다. 나중에 가서는 양쪽 엄마들이 누가 더 맛있고 근사한 밥상을 차려주나 마치 내기라도 거신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B 엄마는 K 엄마랑은 뭔가 차원이 다른 음식을 하셨다. 예를 들면 미제 소시지와 통조림이 들어간 떡볶이 같은 것. K의 엄마는 동네 가게나 시장에서 산 재료들로만 음식을 만드시는데. B네 집에서 먹어본 미제 핫도그랑 소시지는 정말 꿀맛이 따로 없었다. 과외를 하면서 둘은 단짝 친구가 됐다. 밥그릇 하나를 놓고도 같이 밥을 나눠 먹을 만큼.         


        K네 엄마랑 B네 아줌마는 같이 어울려 다니시면서 운전학원도 다니셨다. K의 집은 차를 살 형편이 되지 않아서 K엄마는 면허만 따고 운전할 기회도 못 잡으셨지만 B네 아줌마는 중형차를 사서 몰고 다니셨다. 그 모습을 보고 K의 엄마는 내심 부러워하시는 눈치였다. B네 아저씨는 항상 서글서글 웃고 다니셨다. 어쩌다가 마주치면 아저씨는 K에게 용돈도 주시고 공부 열심히 하라며 격려도 해주셨다. K의 아빠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부드럽고 친절한 아저씨. K는 B가 부러웠다. 모든 면에서.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B는 얼마나 좋을까.     

        한 번은 여름방학 때 B가 같이 등산을 다니자고 제안했다. B랑 있으면 뭐든 재밌었던 K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그 뒤 두 사람은 매일 아침마다 등산을 다녔다. 등산을 다니면서 수다를 많이 떨었는데 K와 B가 주로 했던 대화는 이성문제와 공부였다. B는 중학교 2학년 때 이미 여자 친구가 있었다. 남학생이랑 손도 못 잡아본 K로서는 키스도 해봤다는 B가 뭔가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좋아하는 여학생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고민하는 B를 보며 K는 B가 분명 같은 나이 친구인데 어른처럼 느껴졌다. K는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혼자 짝사랑하는 사람이 바뀌는 게 전부인데, B는 인생을 고민하고 사랑을 고민할 줄 아는 멋진 아이처럼 보였다.      


           “힘들지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앞으로 미래에 어떻게 해야 할지.”     


        결국 B는 캐나다로 간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슬픔에 오래 잠길 사이도 없이 B는 다른 여자와 교제를 시작했다. K도 좋아하는 남학생이 생기면 B에게 제일 먼저 털어놨다. 그러면 B는 마치 오빠처럼 조언해 줬다. 함께 과외공부를 하는 것도 재밌었다. B는 공부를 잘했다. K는 질투가 나서 더 잘해보려고 했지만 항상 B보다 뒤떨어졌다. 공부도 잘하고, 연애도 잘하고, B는 멋진 친구, 그 이상이었다.               


           좋은 친구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이유는 두 가지다. 둘 중 한 사람이 친구관계를 넘는 다른 걸 원하는 경우와, 뜻하지 않게 외부적 요인으로 상황이 바뀔 때다. 이들은 전자에 해당된다.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둘은 산에 가기로 했다. 티브이 뉴스에서 비가 올지도 모른단 예보가 있었다. K는 혹시 몰라 작은 우산 하나를 가방에 넣어갔다. 산 입구에 다다르자, 언제 비걱정을 했냐는 듯, 둘은 낄낄거리면서 어제 봤던 티브이 방송에 대해 얘기했다. 그런데 산 중턱쯤 갔을까. 분명히 약간 흐리기만 했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소나기 일거야 하면서 K는 작은 우산을 펴고 B에게 우산 속에 들어오라고 했다. 큰 전나무 아래서 둘은 한참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비는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빗줄기는 되레 강해졌다. B와 K는 좀 더 가까이 붙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결국 어깨동무를 하다가 K와 B는 끌어안아버렸다.      


           “춥지? 일루 와서 나한테 붙어.”

           “응”     


        K는 B 가슴이 이렇게 넓고 포근한지 처음 알았다. 부끄러워서 떨어지려고 하자 B는 K를 더 꽉 안았다.           

           “숨 막혀.”     


        K가 얘기하는데 갑자기 B가 키스를 했다. 키스를 처음 해본 K는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B가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것. 입술을 다물지 않는 것.”      


 그게 K가 처음 해본 키스에 대한 기억이다. 비는 그칠 생각을 안 했고, B와 K는 꼭 끌어안은 채 작은 우산에 비를 피하면서 산 아래로 내려왔다. 산 아래 다다랐을 땐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그쳤다.   

        

        “이제 우리 어떡해?”     

        “뭘 어떡해. 바보.”

        “아…. 아니 우리 친구잖아.”

        “그래 친구지.”

        “친구는 키스하는 거 아니잖아.”

        “그래? 그럼 나하고 사귀면 되겠네.”

        “너 여자 친구 있잖아.”

        “헤어지려고 했어.”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그다음부터 둘은 제일 친한 연인 사이가 됐다. 과외를 하다가 잠시 선생님이 화장실을 가시면 B는 K 옆자리로 와서 키스를 했다. 결국 선생님이 눈치 챘다.     


           “너희 둘이 서로 좋아하지?”

           “네? 아니요. 네.”

           “네 맞아요.”     


머뭇거리는 K와는 달리 B는 자신 있게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하면서 사귀어라. 알았지?”

           “네~”     


        친구에서 연인이 됐지만 K와 B는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다만 학교 끝나고 집에 가려고 교문 앞에 나와 보면 B가 K를 기다리고 있거나, 아침에 학교 갈 때 B가 대문 앞에 기다리고 있고, 집 앞에 나가보면 미제 초콜릿상자를 K에게 안겨주고 갔다. K는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잘 몰랐다. 아니 사실 예전과 달라진 게 뭘까 했다. 몇 번이나 B는 K에게 키스하고 싶다고 했지만 K는 피식 웃으면서 “안 할래”라고 하며 도망갔다. 그래도 속상한 일이라도 있을 참이면 B는 어떻게 알았는지 K에게 제일 먼저 달려와서 꼭 안아주면서 “괜찮다”라고 했다. 사귄 지 100일이 되던 날엔 B가 K에게 편지와 장미꽃다발을 선물했다. 그러나 한 사람과 오래 사귀지 못하는 B는 어느 틈에 다른 여학생에게 마음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B의 행동이 서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뭔가 어색하던 분위기와 불편한 사이가 다시 편해지는 것 같아서 좋았다. B는 많이 미안해했지만 “그래도 우린 계속 친구지?” 라면서 K가 웃었다. 그리고 둘은 다시 단짝 친구로 돌아갔다.       


        B와의 우정은 계속 오래가는 줄 알았다. 적어도 그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B의 집에서 과외를 할 때면 항상 옆방에서 신기한 소리가 났다. 장난감 블록 같은 걸 착착 맞추는 소리, 옆으로 장난감 블록이 밀리는 소리, 나무장난감들을 탁탁 놓는 소리. 장기를 두는 걸까? 무슨 소리지? K는 공부하는 중간 중간 옆방에서 나는 기이한 소리가 뭔지 궁금했지만 알 방법은 없었다. 그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았을 때 K는 B를 만날 수 없었다. 연락을 피한 것이다. B의 아빠는 마작에 빠져 계셨다. K와 B가 과외할 때 옆방에서 나던 의문의 소리는 바로 마작 패를 두던 소리였다. 마작을 다음 위해 B의 아빠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다. 사실 K집에도 돈을 빌리러 왔다. 그리고 K엄마는 돈을 빌려줬다. B의 엄마는 남편이 도박을 했다는 충격보다 당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K의 집에 돈을 빌렸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해서 어디서 구했는지 다음 날 찾아와서 돈을 갚았다. 그리고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B네는 갑자기 야반도주하듯 이사를 가버렸다. B의 아빠는 이사 가기도 전에 이미 도망을 친 상황. 동네사람들은 “내 돈 내놓으라. 며 빈집 대문을 두들겼지만 아무도 없는 집에서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K는 B와 연락할 수 없었다. B가 대학을 갔고 등록금과 지낼 곳이 없어서 독서실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독서실 총무 일을 한다는 소식은 멀리서 들었지만 B에게 연락할 자신이 없었다. 몇 년이나 시간이 흘렀을까. K는 B에게 용기 내서 전화를 걸었다.     


            “B야, 잘 지내니?”

           “반갑다. 그래 잘 지내.”     


다시 만난 B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부잣집 귀공자 같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고생에 찌든 얼굴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부모님은 건강하시고?”

           “그냥 그래. 수원에서 호프 집 하셔. 아빠는 아직 이시고.”     


      이별도 사랑처럼 성숙할 수 있을까? 철부지 어린 시절 만나 비록 사랑은 아니었지만 사랑보다 더 진한 우정을 나눴던 두 사람. B와 커피 한잔을 마시고 돌아서면서 K는 더 이상 B를 만나지 못할 것이란 걸 예감했다. 몇 년 동안은 B가 결혼을 했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된 것을 알았지만 예전처럼 반갑게 연락할 자신이 없었다.   몇 년이 흘렀을까. B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봄비가 많이 오던 4월의 어느 날이었다. B는 술에 취해 있었고, 목소리가 많이 잠겨 있었다. 이혼을 했다고 했다. 아이들과도 떨어져서 타지에서 일하면서 혼자 살고 있다고. 그러더니 갑자기 불광동이 그립다고 했다. 


         “중학교 언덕에서 겨울에 눈 얼었을 때 마대자루 깔고 썰매 타던 거 기억나? 그때 참 재밌었는데. 너 밥 많다고 맨날 네 밥 반 그릇 나 줬던 거는? 너 때문에 5킬로나 쪘다고. 짜식. 우리 나중에 불광동에 꼭 다시 가자.”     


        그러자고 B에게 얘기했지만 K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종종 우리는 이별을 예감한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다해 얘기했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별은 성큼성큼 찾아왔다. 그는 지금 어딘가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비록 B와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이 났지만 봄비가 내리는 날이면 K는 나지막한 목소리의 B가, 다시 가보지 못한 불광동이 자꾸 생각났다. 아주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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