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밖에서만 멋있는 남자
인생 최악의 남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K는 망설임 없이 N을 말한다. 그 무렵 모든 일이 다 잘되고 있었다.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만 같았다. 하나에서 열까지 승승장구했다. 어려운 박사 학위도 따냈고, K를 괴롭혔던 턱관절도 수술을 무사히 마쳐서 회복 중이었다. 한국에 인맥도 백도 없었지만 어렵지 않게 강의 자리를 구했다. 이혼을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인기도 많았고 K가 좋다고 하는 근사한 남자들도 많았다. 경제적으로도 풍족해서 사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도 맘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모든 시련은 가장 좋을 때 일어나는 것일까
H는 대학교수였다. 인문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분야에서 꽤 이름이 알려져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면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사람이었다. ‘행복전도사’로 이름 불릴 만큼, 사람들에게 ‘행복해지는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고 다녔다. 강의실에서 그는 친절하고, 인자하며, 박학다식한 최고의 강사였다.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쳤고,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K가 H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H를 개인적으로 만나면서 이 모든 것이 그의 쇼맨십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처음부터 본색을 드러냈던 것은 아니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그였지만 K가 부르면 열일을 마다하고 달려왔다. 연륜이 있고, 인문학을 가르쳐서 그런지 삶에 대한 방향과 지표도 누구보다 확고했다. K의 첫 강의를 앞두고 따뜻한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던 H는 공부를 잘 가르치려면 좋은 필기구가 있어야 한다면서 값비싼 펜과 연필도 선물했다. K와 H는 곧 연인이 됐고, K는 든든한 백이 생긴 것만 같아서 좋았다. K에게는 불치병 같은 나쁜 성격이 하나 있다. 자기 자신도 챙기지 못하면서 남을 챙기는 버릇이다. 조금만 연민이 가는 사람을 보면 밥이라도 한 그릇 해서 먹여야 직성이 풀리는 오지랖 넓은 성격. 좋은 사람을 만나서 이런 성격이 나오면 금상첨화지만 나쁜 사람을 만나면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내어주고 상처만 받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K의 마음에 불치병이 다시 도지게 만든 것은 H였다. 강의하러 다니느라 아침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다닌다는 말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버리면 되는데 K는 그러지 못했다. 어느 틈에 H에게 밥을 지어 주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이 먹거나 쓰려고 했던 것도 내어주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때부터 벌어졌다. H는 기다렸다는 듯 K가 만든 음식과 식재료는 물론,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씩 집에 가지고 갔다. K는 그걸 막지 못했다. 거절하기에는 H가 너무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거 내가 가져가면 되겠다. 넌 하나만 있으면 되잖아.”
H는 마침내 K의 베개까지 손을 댔다. 집에 있는 자신의 베개보다 더 좋아 보인다면서. 황당했다. 그래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행동은 점점 더 노골적이고 과감해졌다. 밥그릇이 두 개인 걸 보고, 하나는 내가 가져가야겠다고 하고, 커피 잔, 접시, 나중에는 숟가락까지 가져갔다. 그러면서도 H는 K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 까봐 안달이 나서 늘 윽박지르며 “너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은 마치 사실처럼 K를 붙잡았다. 일종의 가스라이팅처럼 K는 H와의 인연을 이제 끊어버려야지 하고 결심했다 가도 막상 그 사람의 뛰어난 언변과 자기만의 논리로 설득하면 거짓말처럼 어느새 그를 다시 받아주고 있었다. K가 가진 것을 모두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물건뿐이 아니었다. H는 K를 보자마자 원하든 원하지 않던 무조건 그녀를 침대로 끌고 갔다. K가 싫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H는 “넌 내 거”라면서 그녀를 저항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K는 무서우면서도 그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도 또 저 남자와 보낼 수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뿐.
그의 이상한 행동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전화기에 있는 남자 이름은 모두 지우라고 했다. 친구든 아는 사람이든 남자는 안 된다고. K는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남녀공학만 나와서 남자친구가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이 친구들과의 관계를 모두 하루아침에 정리하라니. 지금 생각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왜 동의하고 따라줬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그 당시에는 그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만남은 1년간 지속됐다. 물론 매사에 이런 나쁜 모습을 보여줬던 건 아니었다. 다정하고 따뜻할 땐 끝도 없이 포근하고 따뜻했다. 바로 이런 이중적인 H의 모습이 K로 하여금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던 건지도 모른다. K는 점점 H의 모습이 낯설고 싫었다.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외부에서 강의를 하는 그의 모습은 분명 누가 봐도 올바르고, 건실하며, 여유 있어 보였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갈수록, 그의 본모습은 수면 위로 떠올랐고, 그 모습은 온전히 K에게 상처를 줬다.
이때부터 K는 H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노력했다. 몇 번의 이별 통보와 연락처 차단을 통해 그와의 인연을 멈추게 하려 했다. 그러나 H는 끈질기게 헤어짐을 거부하고 K를 찾아왔다. 결국 마음 약한 K는 그를 다시 받아주고 또 받아줬지만, 얼마 안 가 후회했다. 이런 반복되는 헤어짐과 재회 끝에 결국 K는 결단을 내렸고 그를 완전히 떼어내 버렸다. 처음에 H와 헤어지고 나서 그를 몹시 원망했다. 내 삶을 망쳐 놓은 것 같아서. 내가 가진 것을 강탈해 버리고 떠난 것 같아서. 주변 친구들에게 얼마나 그가 악랄했는지, 또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매일이 멀다 하고 하소연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K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됐다.
“정말 그는 그저 나쁜 사람이었을까?”
그가 나쁜 사람인 게 틀림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비난하고 있는 K는 자기 자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인 지 모른다. 그런 천성을 가진 사람인 거다. 하지만 이 관계를 나쁘게 만든 것은 악한 천성을 가진 자에게 똑바로 처신하지 못한 자신에게 더 문제가 크단 걸 깨달았다. 만약 좀 더 신중하게 천천히 그 사람을 들여다보고 교제를 결정했더라면, 일련의 힘든 일들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단편적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감정을 키웠고, 그 모습이 그의 전부라고 믿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진짜 모습들이 나타났을 때 받아들이지 못했고, 힘들어했던 것이다. H와 교제를 끝냈을 때, 그를 원망하고 비난했다. 내 시간과 에너지와 감정을 헛되게 소비했다는 분노는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쓸데없이 내 시간과 감정만 낭비했어!”
생각만 해도 분이 풀리지 않고 왜 이렇게 억울했던 건지. K는 그와 관련된 물건은 죄다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다. 메신저와 이메일 SNS 등에서 그를 차단, 삭제해 버렸다. 이렇게 그를 자기 주변에서 지워버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에 대한 기억과 잔재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나쁜 기억들이 더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왜일까?
놀랍게도. 그 나쁜 기억들 속에서도 좋았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경험들 속에서도 분명 좋았던 순간이 있었다. 이 만남을 통해 얻은 것이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사람을 상대하는데 철저히 관리했던 H는 K에게도 그가 하듯이 사람관계를 철저하게 할 것을 가르쳤었다. 그와 함께하는 동안은 인간관계로 힘든 적은 없었다. 또 시간을 유용하게 쪼개서 쓰는 법도 배웠다. 하루 1분 1초를 헛되게 보내지 않았던 그를 보면서 K도 자극을 받아서 하루를 살 때 마치 이틀을 살듯이 살았던 거다. 어디 그 뿐이던가. 맞지 않는 이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맞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대립된 인간 군상을 통해 내게 맞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거다. 실제로 H는 K가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람을 보는 눈을 키워줬다.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 내 방식에도 잘못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상대방은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라고 문제를 상대방에게 돌리는 것보다 상대방이 원래 그런 사람인데 K는 어떻게 그 사람에게 행동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상대방이 내게 어떻게 해도 나 스스로 가진 주관대로 흔들리지 않고 행동했다면 상처도 덜 받고 상대방도 자신의 주장을 덜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내게서 가지고 가려던 H에게서 K가 만남의 초반부터 분명한 선을 그었다면 어땠을까.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 잘못되면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을 원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군가의 잘잘못이 있기 이전에 자신의 문제가 더 크다. 잘못된 만남은 없다. 쓸데없는 만남은 더더욱 없다. 쓸데없는 이별도 없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배울 것투성이다.
컴퓨터에 설치된 짝 맞추기 카드 게임이 있다. 카드의 숫자보다 하나 적거나 낮은 숫자를 골라서 하나씩 없애는 거다. 게임을 하다가 보면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두 개인 경우가 있다. 카드 하나는 숫자가 적은 것이고 하나는 숫자가 많은 거다. 어떤 숫자를 선택해야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인지는 게임을 해봐야 안다. 분명한 것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하나를 버리는 카드로 정하고 한 가지를 정해서 뽑는다. 그런데 나중에 게임이 끝날 때 즈음 내가 버린 카드가 쓸모 있는 결정적인 카드로 변할 때를 만난다. 몇 분 전에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버려둔 카드였는데 몇 분이 지난 지금 게임을 이길 수 있는 카드로 변한 것이다. 쓸모없는 카드가 의외의 상황에서 다른 어떤 카드보다 더 쓸모 있는 카드가 된 것이다. 사람과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쓸데없는 만남은 없다. 쓸데없는 이별도 없다. 다 내게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 사람을 만난 것도 또 헤어진 것도 지나고 나서 보면 다 의미 있는 순간들이었다. 만남은 홀쭉하게 찾아왔다. 무언가를 채우고 나서 온 게 아니라 내 곁에 와서 채울 것을 찾고 있었다. 이제 통통해진 이별은 발길을 돌린다. 이 만남이 최악이지만 그렇다고 내다 버릴 쓰레기는 아니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비록 너는 개새끼지만 사랑했다. 밥은 먹고 다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