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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낯선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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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in Jan 03. 2021

EP01 제주 - '혼자'옵서예!

모든 게 서툰 흥분의 향기 

나는 16학번이다. 결과 빼고는(...) 모든 게 완벽했던 재수 생활 끝에 대학생이 되었다. 


수능 성적이 나오고 한 달여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방에 박혀서 스마트 폰만 했다. '괜찮다'며 '이 정도면 됐다'며 잘 웃고, 잘 먹고, 잘 쌌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괜찮지 않았던 것 같다.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결과 때문에 과정은 허무해졌다. 내 인생에서 최고로 열심히 살았던 1년을 미워했다가, 부정했다가, 마침내 동정했다. 그냥 속시원히 결과를 미워했으면 좋았을 걸. 내 노력을 동정했기에 쉽게 벗어나질 못했다. 


내가 진짜 괜찮아진 건 방 밖으로 나와야겠다고 결심한 바로 그날이었던 것 같다. 


 

2016년 2월 3일에 예약한 2016년 2월 4일 비행기표:)


홀로서기 제주 여행, 어색한 흥분의 향기 

혼자 제주도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의 경로는 기억나지 않는다. 역시 결과만 기억하는 더러..흠... 아마 방구석 탈출이라는 목표에 가장 합리적인 결과였던 것 같다. 


인생에서 최고로 자유로운 시간을 누리고 있던 나에게 일정은 문제 되지 않았다. 출발까지 15시간 남은 비행기표를 끊었다. 수능이 끝나고도 줄곧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서있던 내가 어른들의 세상으로 한 발짝 내디딘 기분이었다.     


그래, 나는 (무려 두 번째) 수능이 끝난 사람이다!


2박 3일 홀로서기 제주도 여행이 시작됐다. 처음 하는 여행이 무서울 법도 한데, 수능 끝난(망한) 재수생은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책가방 하나 달랑 매고 우선 방 밖으로 나왔다. 계획은 없고, 한 번 내던져져 보자는 게 목표였다. 


2월의 제주도는 포근하고 시원했다. 공항 문이 열리자마자 어색하지만 흥분되는 향기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뭐든 할 기세로 공항을 박차고 나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뚜벅이 여행자의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떻게 노는지도 모르는 재수생은 결국 첫 여행지로 제주도립미술관을 선택한다...^^



그래요...'대학'이 떠나갔어요...


기가 막히게도 미술관엔 '마음 약방'이라는 자판기가 있었다. 1000원을 넣으면 원하는 약을 셀프 처방할 수 있었다. '월요병 말기'라든가, '인생 낙오 증후군', '습관성 만성피로'같은 현대인의 인기(?) 질병 약들은 모두 품절된 상태였다. 지금의 나라면 '참 나, 이제는 서로의 고통도 사고 파는구나'하며 염세적인 시선을 쏘았겠지만 (하지만 그러다가도 '근데... 천 원이면 괜찮은데?' 하며 샀을 듯ㅎㅎ) 순수했던 난 이 따뜻한 자판기의 발견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 같다. 


상실 후유증. 사랑이 떠나간 건 아니었지만 허무한 마음을 달래는 데 적당한 약을 구입했다. 알약 캡슐 안에 똘똘 말려진 종이에는 희망찬 말들이 빼곡했다. 여행의 시작에 만난 위로의 손길에 내 기분은 한 층 더 업됐다. 마치 제주도가 온 힘을 다해 나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 



제주: 혼저옵서예~!

이 여행, 시작이 참 좋다. 


차로 34분 걸리는 거리가 두 시간이 되는 뚜벅이 매-직


덧붙임.

작품 사진은 하나도 없는 걸 보니 사진 촬영 금지였나 보다. 

암, 그럼그럼. 절대 흥미롭지 않았던 게 ㅇㅏ 니다...



다음 에피소드,

EP02 제주 - 여행자 DNA를 심어준 나의 첫 게스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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