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다정한 말이 다정함의 핵심인 줄로 믿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다정한 언어로 따스하게 말을 하면 그이를 다정한 사람이라고 믿곤 했다. 이제는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 상스러운 말을 쓰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차라리 말이 상스러워도 배려가 담긴 행동이 낫다고 생각한다. 다정한 말에 미혹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주변에 말이 다정한 사람은 차고 넘친다. 다정한 말은 사회생활의 기본인지도. 그래서 다정한 말의 얄팍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한 친구는 참으로 한결같이 말이 다정한데, 안타깝게도 행동이 없다. 아주 깊게 사귀었던 한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행동은 참으로 다정했다. 그이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알게 된 것은 시간이 무척이나 흐른 후였다.
쉽게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많은 말들을 참는다. 친구 사이에서도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쉬이 하지 않는다. 말은 순간이기에, 말은 쉽게 변할 수 있기에 사랑한다는 말도 약속도 잘하지 않는다. 표현을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대신 한 번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내가 타인에게 진심을 주며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래서인지 말이 앞서는 사람과는 점점 사이의 틈이 벌어진다. 아주 오랜 시간을 만났음에도 여전히 좋은 인연으로 이어져오는 친구 소소는 정말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다. 소소는 행동을 하며 말하는 사람이다. 나보다 어린 동생이지만 늘 소소에게서 배울 점들을 발견한다. 소소를 만나면 나도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하게 된다.
소소는 안정적이고 훌륭한 직장에 소속되어 있고, 전문직종 면허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발전을 위해 새로운 공부와 도전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소소가 얼마나 바쁠지 짐작하고 있는터라 소소에게 만남과 연락을 종용하지 않는다. 내 성격이 조심스럽고 소심한 탓도 있겠지만, 소소의 바쁜 생활을 알고 있기에 소소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다. 나 또한 소소를 생각하며 나의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몇 개월이 금세 지나가고 우리는 또 환한 미소로 만날 수 있으니까. 소소는 때때로 먼저 나의 안부를 묻고, 바쁜 일이 지나가면 먼저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해 주는 고마운 친구다.
9월에 만나자는 약속을 봄에 했었다. 9월의 언젠가 소소에게서 연락이 왔고, 우리는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았다.
"언니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음식 생각해 보고 알려주세요~ 우리 이번에 같이 가 봐요."
소소의 다정한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는데, 나도 나의 도전을 위해 골머리를 앓느라 소소에게 답을 미처 하지 못했다. 약속한 날이 코 앞에 다가온 어느 날 소소가 먼저 내게 물어왔다. 어디에 가고 싶은지, 뭘 먹고 싶은지 답을 하지도 못했는데 소소가 데이트 코스를 정리해 주었다.
"그때 가족 중에 언니만 M호수 못 가봤다고 했죠? 거기 가는 거 어때요? 그 근처에 맛있는 브런치 카페도 있어요."
그 언젠가 소소의 차 안에서 스치듯이 한 말을 소소가 기억해 주었다. 멋진 소소.
10월 초, 백마 탄 공주 소소가 우리 집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늘 소소가 태우러 오는 것이 미안해서, 내가 소소네 동네로 갈까 몇 차례 묻기도 했지만 소소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데리러 또 집 앞으로 온다. 그렇게 차를 몰고 가면서 소소가 묻는다.
"언니, 고기 어때요? 전부터 언니랑 같이 가고 싶었던 고깃집이 있는데, 마침 호수 가는 길에 있거든요. 오늘 제가 언니 고기 사드리고 싶어요! 몸보신 좀 해요."
내가 사겠다고 말을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나에게 맛난 것을 사주려고 애쓰는 우리 소소.
소소가 사준 안심을 구워 먹으니, 안심이 되었다. 고기가 사르르 녹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태어나 먹어본 소고기 중에 최고의 맛이었다. 게다가 키 크고 예쁜 아가씨가 사준 고기라니!
장흥 관자와 함께 하는 삼합도 소소가 주문해 주었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차돌박이 위에 버터에 구운 하얀 관자와 금빛 나는 고급 버섯을 구워 얹어 먹으니 입 안에서 고소한 유전이 터지는 맛이었다. 꼬숩고 맛난, 내 생애 첫 삼합!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점심식사를 하고 나도 소소처럼 좋아하는 사람에게 멋지게 식사를 대접할 수 있는 멋진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솔직하게 소소에게 털어놓았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사주는 이렇게 맛있는 소고기는 처음이라고. 소소가 소녀처럼 환하게 웃었다.
소소의 차를 타고 우리는 호수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대한 호수의 풍경에 지레 겁을 먹었지만, 운동을 열심히 하는 소소를 열심히 따라다니려고 애썼다. 호수 둘레길을 걸으며 만나는 풍경들에 발걸음을 멈추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가 또 소소를 쫓아 뛰곤 했다. 10월에 접어들었지만 여름처럼 뜨거웠다. 워낙에 더위를 잘 타는지라 땀을 흘리고 있으면, 거짓말처럼 가을바람이 불어 열을 살짝 식혀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겁이 많은 내가 소소와 함께 길고 긴 출렁다리를 건너갔다가 되돌아왔다. 다리를 건너가면서도 소소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리를 건너가서 멋진 벤치에 앉았다 일어났더니, 소소가 나의 귀여운 몸매를 칭찬해 주어서 둔부를 팡팡 치며 어필을 해 보았다. 차분한 소소는 폭소하며 기겁을 했다. 오랜 인연의 우리가 다시 만나 처음 카페에서 차 마시는 데이트를 했던 때와 지금의 나는 체중이 10킬로그램 정도 차이가 난다. 그 이야기를 하며 뚱뚱해진 것이 고민이라고 하였더니, 그때와 지금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며 소소는 그렇게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소소는 진짜 입에 침을 바르지 않았지만, 진실된 사람이기에 분명 생각 그대로를 말했을 것이다. 기가 죽은 내게 소소의 다정한 말들은 무척이나 힘이 되었다.
우리는 출렁다리를 다시 되돌아와서 전망대 카페에 올랐다. 소소를 만나면 나는 말이 무척 많아진다. 소소는 늘 차분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이 가득 담긴 이야기들을 되돌려준다. 속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전망대를 내려왔다. 그대로 헤어져도 섭섭하지 않을 만큼의 데이트인데 소소는 가보았던 좋은 곳에 또 나를 데려가려 한다. 소소의 차는 그대로 길을 달리고 달려 고양시의 중남미 문화원에까지 이르렀다.
친구가 없기도 하거니와, 평소 밖에 다니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내게 소소와의 데이트는 정말 특별하다. 소소는 나를 만날 때마다 좋았던 곳을 여기저기 데려가려 하고, 맛있는 것을 잔뜩 사주려 애쓴다. 오래 투병 중인 나를 불쌍하게 여겨서도 아니고, 그저 좋은 것을 나와 함께 하고픈 순수한 사랑이라는 것을 온 마음으로 느끼기에 기쁜 마음으로 응한다.
꼭 1년이 되었다. 아빠가 돌아가셨고, 그 이후로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대표님이 내가 속한 사업부를 정리하셨고, 자연히 갈 곳을 잃었다. 1년 사이에 끊어진 인연들도 무척 많다. 요지 간에는 사람과 엮이는 일 자체가 싫어서 최대한 혼자 지내려 하였다. 누군가 내게 안부를 묻는 일도 부담스러웠다. 정말 가족이나 가장 가까운 친구 한 둘과만 교류를 하며 살았다. 마흔이 가까워지면 관계에 대해 고민을 하는 일 따위 없을 줄 알았건만, 여전히 사람이 제일 무섭고 관계가 제일 어렵다. 사람 사이가 얼마나 깊고 오래되었든 부질없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한다. 그런 중에도 내게 여전히 다정한 소소를 보며, 소소의 다정함에는 마음이 동하는 나를 보며 생각한다. 소소는 차분하고 담백한 사람이지만 늘 진심으로 나를 대해주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인연이다. 나도 언젠가 소소처럼 타인에게 진심을, 진실한 다정함을 건네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직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한 마음의 여유는 내게 너무도 먼 일처럼 느껴지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과 소소에게라도 조금 더 다정해지겠다고 다짐해 본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그들을 향한 다정함이 나 자신을 위한 다정함이 될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