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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달보름 Sep 16. 2022

여성의 해방감을 찾아서

델마와 루이스를 보고



 해방감에 대해 고민한다. 어학사전에서 해방은 ‘속박 또는 예속 상태에서 풀어 주어 자유롭게 함.’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가부장제 속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속박과 예속은 시대가 많이 변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짜인 틀이다. <델마와 루이스>를 봤을 때를 기억한다. 차를 타고 끝까지 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화면이 멈추었을 때의 그것은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이카루스였을까, 떨어지는 이카루스였을까? 전자라면 희망이고 후자라면 고통이지만 둘 다 가고자 하는 목표에 가닿거나 혹은 가닿은 이후라 절망이라 부르고 싶진 않다. 어쩌다 저지른 범죄를 수습하기 위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며 탈출하고 도망가는 그녀들의 모습은 쫓기는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어떤 이유 때문일까? 영화를 다시 보고 분석하면서 그 지점을 추적하고 싶었다. 그 이유를 알면 내 삶 속에서도 해방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 결혼한 후 남편에게 붙잡혀 사는 델마는 루이스와 휴가를 떠나기로 약속하고 남편에게 허락도 받지 않은 채 편지 한 통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휴가다운 휴가를 처음 즐기던 그들이 갔던 곳은 클럽이다. 술을 기울이며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는 행위에서, 환하게 미소 짓는 델마의 표정에서 첫 번째 해방을 느낀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남편과 애인에게 벗어나 자유를 느낀다. 델마에게 추근대는 남자가 있지만 그 마저도 두 번째 해방이 된다. 술과 담배 그리고 섹스. 여성이 해방감을 느끼는 기초 단계가 술과 담배와 섹스라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 델마는 남자에게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하고 성폭력을 당할 지경에 이른다. 다행스럽게도 뒤따라 나온 루이스는 혹시 몰라 가져온 총기로 남성을 위협하며 델마를 놓아 달라고 한다. 순순히 델마를 놓아준 남성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뱉는다. “끝내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냥 갔어도 되는 순간 루이스는 방아쇠를 당긴다. 어쩌면 ‘정당방위’가 될지도 혹은 아닐지도 모르는 그들의 첫 범죄가 시작된 순간이다. 두 여성은 해방과 동시에 죄를 짓고 달아나는 속박의 굴레에 갇히고 루이스는 그곳을 두 여성이 향하여 간다. 30년 전 만들어진 영화에서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서부극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멕시코로 향하는 그들의 모험은 남성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이 매우 신선하다. 총으로 쏘고 칼로 찌르는 대신 남성으로부터의 성범죄에서 해방되려는 움직임이며 남성 권력으로 상징되는 경찰들로부터 도망치려는 질주다.


 

 델마와 다르게 연인 관계에서는 조금 더 주체적인 모습을 보였던 루이스는 애인에게 이유를 묻지 말되 돈을 빌려달라 요청한다. 루이스의 애인은 약속된 출금 장소에 직접 나와 돈을 건네주는 친절함을 보여주지만, 결국 애인을 향한 의심에서 비롯되어 따라온 수고로움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와중에 반지까지 내미는 치밀함을 보이지만 그런 꼼수에 넘어갈 루이스가 아니다.  반면에, 여행길을 떠나며  자신을 구속하는 남편에게 전화한 델마는 “당신은 내 남편이지 아빠가 아니야.”라고 말한다. 여전히 구속되고 있지만 해방감을 찾고자 하는 첫 번째 델마의 도약이다. 여정 중 만난 제이디(브래드 피트)는 가는 여정에 끼어들고, 델마는 그와의 하룻밤 역시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성적 경험을 주는 또 다른 해방의 도구로 활용한다. 강하고 약함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지라도 주체적인 모습을 보였던 인물로서 상대적인 비교를 해보자. 영화 초반에는 델마보다 루이스가 그에 부합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제이디와 잠자리를 가진 이후 루이스의 애인으로부터 받은 현금을 도둑맞았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하는 루이스를 위로해 주는 인물은 델마다. 영화가 시작된 정확히 절반이 지나갈 즈음, 델마는 영화 오프닝의 루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달랜다. 일어나라고, 걱정 말라고. 움직이자고. 이 지점에서 몇 번의 해방 행위를 통해 주체성을 찾는 델마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루이스와 델마>가 아닌 <델마와 루이스>라고 지어진 제목에서 좀 더 중요한 사람이 앞쪽에 배치되는 뻔한 규칙이 적용된 것은 아닐까?


 빈털터리가 된 둘을 구제하는 다음 스텝도 델마가 자처한다. 잠시 마트에 들른 틈을 타 자신을 바라보던 두 명의 나이 든 여성들의 모습을 보며 루이스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 해 본다. 백발머리의 여인, 어설프게 염색한 갈색머리를 가지고 델마처럼 선글라스를 쓴 여인. 주인공도 아닌 두 여인을  애처로운 카메라가 훑으며 낭만적인 음악이 흐른다. 점차 가깝게 백발머리 여인을 잡는 카메라 앵글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다. 미래에서 온 델마와 루이스였을까? 그녀와 눈을 맞추며 한참을 바라보면 루이스는 헝클어진 얼굴을 정리하려 립스틱을 찾아 룸미러로 얼굴을 들여다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도망 다니는 이 상황에, 설사 그들에게 잡히지 않더라도 어차피 늙어 버리는 다가올 세월인데 입술 색을 짙게 하는 일이 하등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사이 부드럽고 친절하지만 위협적으로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태도 같지만 CCTV를 보면 말이 된다) 강도짓을 한 델마는 빨리 루이스에게 빨리  출발하라 재촉한다. 한편, 그들을 특정한 형사들은 제이디를 체포하여 자백을 받아낸다. 둘이 마트를 턴 방식은 제이디가 델마에게 전수한 방식과 유사했다. 강도짓 역시 그녀들이 행했던 해방감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다. 잘못된 걸 알면서 하지 않아도 되는 걸 알면서, 항상 남성의 그것으로 여겨졌던 일탈과 범죄를 계속해서 행하며 델마는 이번 여행이 정말 멋지다고 자조적으로 고백한다. 둘의 일탈이 극에  달할 때 리들리 스콧 감독은  그들에게 공감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선택한다. 과잉 진압을 하는 백인 남성 경찰을 뒷트렁크에 가두며 동시에 지나가는 유색인종이 구원하지 않게 만들며, 여정 중 그들을 쫓으며 성희롱을 일삼는 남성의 트럭(어쩌면 또 다른 남성성을 상징하는)을 폭파시키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으로 카타르시스를 전한다.


결국 목적지인 멕시코까지 가지 못한 채 경찰의 무력에 둘러 싸인다. 고작 여자 둘을 잡으러 그렇게 많은 경찰과 무기가 총출동되다니. 관객 못지않게 델마와 루이스 역시 놀란다. 이쯤에서 관객이 바라는 결말은 무엇일지 궁금해지만 어떤 결말도 비극일 수밖에 없던 감독은 둘을 하늘 위로 날게 만든다. 그 선택을 ‘잡히지 않을 것’을 선택하자고 표현하는 루이스의 대사 역시 인상적이다. 공중에 떠 버린 차를 한참을 멈춘 채로 응시하는 화면을 바라보며 당시의 관객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들은 진정으로 해방되었을까? 나는 이 영화의 주제가 여성들의 해방감이라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과연 그들이 해방되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날지도 떨어지지도 못한 차에서도 그렇고 30년이 지난 현재의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여전히 손뼉 친다는 면에서도 그렇다. 여성으로 살며 가부장제에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영화에서 나온 술과 담배와 성은 아니다. 주변의 많은 여성들과 해방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부장제에서 벗어나고 싶어 선택한  술, 담배, 성은 결국 자기 파괴 행위로 이어짐을 전해 들은 적이 많다. 그렇다면 범죄일까? 그것도 아니다. 어떤 해방감인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는 내 감정은 붕 떠서 여전히 부유하고 있을 델마와 루이스의 30년 전의 차로 수렴된다. 그 해답을 알 때엔 델마와 루이스의 차에도 날개가 달리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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