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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e Jun 14. 2024

AI와 기후변화 시대에 소는 누가 키우나

한나 아렌트의 labor(노동), work(일), action(활동)

일반인이든 재벌이든 꿈은 '얼른 은퇴해서 집에서 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은퇴하고 집에서 쉬는 사람은 사는 것이 무료해 우울해지고 병이 난다고 하지요. 인간에게 일이 과연 무엇이길래 우리는 이리도 복잡한 반응을 하는 걸까요?


가짜 노동

'가짜 노동'이라는 책을 쓴 덴마크 인류학자 뇌르마르크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재밌는 얘기를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젊은 층이 가짜 노동에 대한 문제인식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데 이는 위에서 결정한 데로 따라야 하는 수직적인 조직문화 때문인 것 같다고요. 반면 덴마크에서는 관리자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걸 회피하다 보니 이로 인한 각종 가짜노동이 생겼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가짜 노동이 참 많습니다. 위에서 시킨 일을 하는 시늉만 한다든지, 수많은 회의에 가서 앉아만 있는 경험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의미 없는 자료를 요구하고 접수하는 것은 가짜 노동을 넘어 자원낭비이기도 하고요. 몇 명 보지도 않는 보고서를 고치고 또 고친다든지, 수많은 이메일 참조 속에 파묻힌다든지, 형식적인 좋은 말로 가득 찬 체크리스트를 채운다든지, 가짜 노동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소를 키운다고 해 봅시다. 소를 키우는 실질적인 일과, 소 키우는 계획을 수립, 협의, 수정하고, 현장에 가서 잘 키우고 있는지 모니터링하는 일의 비율은 어느 정도가 될까요?


"바쁜 척하는 헛짓거리, 노동과 유사한 무의미한 업무인 가짜노동을 하느라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출처 : 가짜노동 저자 "한국 교육열, 빨리빨리 문화가 거짓노동 만들어" (hankookilbo.com))


우리는 사회적, 계급적 관계 속에서 상사나 동료의 기대에 부응하고, 실제보다 자신의 능력과 중요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가짜노동을 한다고 합니다. 보다 근본적 원인은 지난 수백 년간 기술의 발전에 의해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한 것입니다. 하루 8시간 이상 긴 시간을 노동할 필요가 없어지고 나서도 인간은 과거의 노동을 흉내 냅니다. 껍데기만 남았다고 하더라도요.




인간에게 일이란 : 기본소득 vs 정의로운 전환


AI가 인간의 정신노동을 상당 부분 대체할 수 있게 된 요즘, 일하는 척하는 가짜 노동의 시간이 점점 늘어납니다. 하지만 어차피 가짜 노동이 생산적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굳이 일터에 잡아둘 필요가 있을까요? 기술기업들이 부의 많은 비율을 독점하는 경제체제하에서는, 이제 필요한 노동의 절대량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논의를 하고 있지요.


한편에서는 계속해서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just transition (정의로운 전환)을 논의합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국가들은 산업구조를 조정해야 합니다. 시멘트, 발전, 철강, 석유화학 (시발철석) 등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산업이 대상이지요. 축산업도 소의 트럼이 메탄을 내뿜어 기후변화를 일으킵니다. 산업전환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들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좀 더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 정의로운 전환입니다.


누군가는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누군가에게는 일하는 것이 권리이자 생계가 됩니다.




한나 아렌트의 labor(노동), work(일), action(활동)


노동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철학자들은 "노동은 단순한 경제 활동을 넘어, 인간의 본질적 활동이며, 자아실현과 사회적 연대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는 대답을 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좀 더 자세히 구분합니다. 우리가 몸과 정신을 움직여서 일으키는 변화를 노동(labor), 일(work), 활동(action)으로 구분했습니다. 각각이 인간의 삶에서 독특한 역할과 의미가 있다고요.   

     노동(Labor)은 생물학적/육체적 생존을 위한 반복적인 활동입니다. 먹고, 입고, 자기 위한 일들, 식량생산이나 청소 같은 것들이며, 노동은 살아있는 한 멈출 수 없습니다.

일(Work)은 오래가는 무언가를 만드는 활동입니다. 자연을 변형시켜서 인간의 독창성이 가미된 문화적, 사회적 인공물을 만드는 것이죠. 건축, 예술, 과학연구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활동(Action)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행동입니다. 즉 공동체 내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위한 활동이라는 것이죠. 개인의 자유와 독창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한나 아렌트의 정의에 비추어 보면 세탁기와 냉장고, 청소기와 같은 가전제품들이 이미 인간의 "노동(Labor)"을 많이 줄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Labor)"의 산물은 단기간에 소비되고 사라지기 때문에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야 하지요.


정의로운 전환은 모든 사람이 의미 있고 안정적인 노동을 할 권리를 보장하려고 합니다. 우선은 아렌트의 "일(Work)"에 해당하지요. 노동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고 생계를 꾸려나가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니까요. 또한 그 과정에서 인간은 사회적 관계망에 속하게 됩니다. 조직문화가 충분히 성숙하다면, 그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관계 맺는 '활동(Action)"을 하게 되지요.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서 개인이 더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니 아렌트의 "활동(Action)"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의 노동이 더 이상 무언가를 만드는데 유용하지 않기에 인간을 일터로 불러올리지는 않지만, 사회 속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안전망을 쳐주는 것이지요.


미래에는 work는 특정 소수에게 맡기고 모든 사람이 action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학교에서도 work ethic and skill 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잘 스스로를 표현하고 관계를 맺을지에 대해 배우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소를 키우는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AI시대에 소는 기계화된 농장에서 소수의 인원이 자동화된 시스템을 관리하며 키우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 같습니다. 또는 기후변화를 고려하여 소를 키우는 대신 인공육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는 것으로 산업이 개편될지도 모릅니다. 정의로운 전환이 아무리 노동자를 훈련시켜도 농부에서 기술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실업자가 생기고, 이들에게 실업급여라는 명목으로 생계를 일부 지원합니다. 실질은 기본소득과 다르지 않지요.


인간의 노동이 더 이상 무언가를 만드는데 유용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듭니다만, 이것도 산업화시대에 주입받은 노동윤리(노예근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일하지 않는 삶을 지금부터라도 상상해 가며 살아야겠습니다.




글쓰기가 나와 세상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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