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사랑(이슬아)
잘 쓴 글을 내놓고 싶어 브런치 작가가 됐지만, 글을 잘쓰기 위해선 부지런한 노력이 필요했다. 따라주지 않는 행동력을 보완이라도 하듯 창작에 관한 책만 주구장창 읽다 이슬아라는 작가를 알게됐다. ‘부지런한 사랑’은 어린이 글방을 통해 얻은 이야기들을 엮은 이슬아 작가의 책이다. 부지런히 사랑하고 써야만 좋은 글을 낼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제목이다.
우리는 글쓰기의 속성 중하나를 알 것 같았다. 글쓰기는 게으르고 이기적인 우리를 결코 가만히 두지 않았다. 다른이의 눈으로도 세상을 보자고, 스스로에게 갇히지 말자고 글쓰기는 설득했다. 내 속에 나만 너무도 많지는 않도록. 내 속에 당신 쉴 곳도 있도록. 여러 편의 글을 쓰는 사이 우리에게는 체력이 붙었다. 부지런히 쓸 체력과 부지런히 사랑할 체력. 이 부드러운 체력이 우리들 자신뿐 아니라 세계를 수호한다고 나는 믿는다.
부지런한 사랑 6p
어린이 글방엔 소중한 통찰이 넘쳐난다. 나는 어린이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묘사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바로 아이들이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통찰 때문이다. 그들이 무지하고 순수하기만 했다면 얻지 못했을 것들이다.
박민규 작가가 말하길, 좋은 글은 두가지로 나뉜댔다. ‘노인의 마음으로 쓴 소년의 글’ 혹은 ‘소년의 마음으로 쓴 노인의 글’
부지런한 사랑 50p
좋은 글의 핵심에 ‘관점’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같은 것을 다르게 볼줄 알고, 새로운 면을 들춰내는 그런 관점 말이다. 이 점에서 인상 깊었던 조이한 학생의 글을 소개하고 싶다.
언젠가 방귀를 뀌었는데 안뀌었다고 거짓말했다. 엄마가 잘 해줬는데 잘 안해줬다고 거짓말했다. 거짓말 안 했다고 거짓말했다. 그 밖에도 이상한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은 아빠한테도 있고, 엄마한테도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 등 모두한테 있다. 그러니까 모두 쓰는 말이라는거다. 너무 나쁘게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부지런한 사랑 58p
학교는 거짓말이 나쁜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아이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거짓말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안다. 체제에 순응하며 제도권에 들고자 했던 나로서는 얻지 못했을 관점이란 생각이 든다. 자신이 관찰하고 느낀 것이 교과서에 적힌 글보다 더 현실에 가깝다는 확신. 그런 확신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걸까.
또 다른 학생인 나사가 짚어내는 인간 관계에 대한 섬세함이 놀랍다.
(중략) 상철이가 선데이마켓을 알려줬을 때 순간적으로 내 마음의 벽이 허물어졌다. 그래서 같이 가자고 했고 즐겁게 쇼핑을 하고 놀았다. 그런데 상철이의 의사는 들어보지 않았다. 상철이가 ‘콜’하긴 했지만 당황스러워서 거부를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마켓에 있는 내내 즐거웠어도 상철이는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은 아주 가깝게 지내는 친구지만 그때 상철이는 나와 다른 마음일 수도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
부지런한 사랑, 70p
아주 가깝게 지내는 친구 사이라도 거리가 생길 수 있다는 걸, 나사는 안다.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각자가 느끼는 건 다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안다. 서로의 마음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는 말에서,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걸 일찍 깨달아 버린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제하라는 학생은 인간의 입체성을 봤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주제로 한 글을 쓸 때, 아이는 부모에게 발견되는 좋은 면, 나쁜 면, 이상한 면을 말했다.
제하의 글에서 아빠와 엄마는 앞면과 옆면과 뒷면을 가진 입체적인 인물이다. 제하는 아는 듯하다.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하거나 이상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는 걸. 다들 좋은 놈과 나쁜 놈과 이상한 놈을 자기 안에 데리고 살아간다는 걸. 변화무쌍하며 결코 고정적일 수 없는 그들을 설명하려면 ‘좋은, 나쁜, 이상한’보다 더 정확하고 세세한 분류가 필요할 것이다.
부지런한 사랑, 279p
제하는 아마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 감히 짐작한다. 개별성을 인식한 사람은 단어를 고르고, 더 적절한 표현을 고민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더 길게 쓰여진 제하의 글을 읽을 수 있길 바란다.
아이들이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사회적 자아를 민감하게 인식하게 된다. 친구사이에 느껴지는 사회 계급, 각종 자본, 아비투스. 이것들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아도 매일의 일상에서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도혜는 이런 경험에서 인간성을 발달시킨 것 같다.
자신의 용돈을 직접 벌고 전기료와 난방비도 직접 내야하는 사정이 윤이에겐 있었다. 도혜의 반에서 그런 친구는 윤이 뿐이었다. 쉬는 날이면 윤이는 자신의 가난한 집에 친구들을 초대하여 소박한 파티를 하곤 했다. 도혜는 자신이 모르는 슬픔과 낭만을 아는 듯한 윤이의 모습을 남몰래 동경했다. (중략) 사랑하는 친구의 대타로 뛰는 첫 알바 날에 가장 아끼는 티셔츠를 골라 입는 도혜의 마음을 우리는 그려볼 수 있다. 윤이 덕분에 도혜는 처음으로 자신의 ‘있음’이 부끄러워졌다.
부지런한 사랑, 176
친구의 상황에 빗대어 자신이 가진 것을 돌아볼 줄 아는 도혜. 또래 아이들보다 풍부한 감수성을 지녔으리라 생각한다. 더러워 질지 모를, 더러워 졌을 자신이 가장 아끼는 티셔츠를 보며 도혜가 느낀 감정은 뿌듯함이 아니었을까. 그 소중한 마음이 윤이를 살게하고 세상을 밝힐 것이다.
책 곳곳에 생각해보면 좋을 만한 주제가 숨어있다. 이슬아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부분이었지만, 학생들의 글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 여기에 중점을 뒀다. 다른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낸 글들을 옮겨 적고 있자니 내 글쓰기는 반쪽짜리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만들어둔 흐름에 올라 타, 인상 깊은 곳 몇 군데를 짚어 소개하는 수준의 글이라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물론 서평이라는 장르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신형철 평론가의 책을 읽으면 서평에도 그만의 시각과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내공이 부족한 일개미는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소회를 남기며 이번 글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