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돌아오는 성탄절을 맞는 자세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빨간색 온도로 온 도시를 따뜻하게 만드는 크리스마스가.
30번 넘는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기억에 남는 공간이 몇 있다.
우선은 일곱 살 때, 사촌형들과 외할머니 댁 단칸방에서 다같이 어울려놀았던 공간. 이불 안에 양말을 하나씩 숨겨놓았었는데, 거기에는 갖고 싶은 선물이 적힌 쪽지가 들어있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다음 날 12월 25일 아침. 우리는 방문 앞에 쌓여있는 선물 꾸러미들을 발견하자마자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갖고 싶어했던 '백인대장(건담의 한 종류)'이 그 안에 있었다. 아직은 산타를 믿던 시절이었고 우리 다섯 꼬맹이들이 단칸방에서 자도 자리가 남았던 공간이었다. 욕심이 넘쳐 형 양말에 넣었던 또 하나의 쪽지는 생략하겠다.
성인이 되고 난 후 크리스마스는 본연의 색깔을 찾아갔다. 우선 20대 초반에는 사람 많은 곳만 골라다녔다. 동대문 밀리오레에서 이름 모를 비보이들의 공연에 열광하고, 길거리 포차에서 오뎅을 호호 불며 먹어도 행복했다. 돈 3만원 가지고도 밤새도록 동대문에서 아이쇼핑을 하고, 취한 걸음으로 혜화동까지 걸어서 가기도 했다. 손은 이미 씨뻘겋게 시렸을테지만, 그시절엔 그보다 더 뜨거운 에너지가 있었다. 대학로의 이름 모를 bar에 들러서 5,000원 짜리 블랙러시안을 시켜놓고 바텐더가 보여주는 불쇼를 보며 애써 세련된 척했던 귀여움도 놓치지 않았다. '난 이런 거 이미 많이 봤어' 뭐 이런 식의 허세
제대를 한 후에는 대학 남자 동기들끼리 홍대에서 술을 마셨었다. 다들 알겠지만 크리스마스는 방학 기간이다. 우리 동기 7명은 100퍼센트의 출석률을 보이며 나란히 오뎅바에 앉아 정종을 마셨다. 소주를 마실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끼리라도 코트의 깃을 세우며 고독한 남자 코스프레를 했다. 나란히 앉아서. 남자 7명이. 홍대에서... 그리고는 피씨방에 가서 카트라이더를 밤새도록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모든 커플들의 애정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피씨방이 유일했고, 카트의 드리프트 기술은 우리의 슬픈 젊은 날을 망각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20대 중반의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다.
대학 고학년 때는 좀 더 시야가 넓어졌다. 크리스마스가 연인들의 날이란 이상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봉사활동을 했었다. 이름하여 몰래산타. 경기도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가난한 아이들이게 선물을 전해주는 한 봉사단체의 이벤트였다. 아이의 어머니가 적어주신대로 동네 시장에서 털장갑, 털목도리, 장난감, 인형 등을 사기 위해 돌아다녔었다. 한 아이에게 배당된 5,000원의 공금이 부족해 사람들은 자기 지갑을 열어 돈을 보탰고, 그렇게 나는 가난한 아이들의 집을 깜짝 방문하는 몰래 산타가 되었다.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도 있었고, 더 좋은장난감을 달라며 보채는 아이도 있었고, 내 수염을 당기며 산타를 믿지 않는 아이도 있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나는 건 시골집에 사는 다문화가족 6남매였다. 막내에게만 선물을 해서 미안했는데... 방긋 웃는 막내를 보며 뿌듯해하는 언니, 오빠 꼬맹이들이 너무 대견스러워 눈시울이 훈훈해졌던 기억.
그리고 30대의 크리스마스. 25일 아침을 기다리며 양말에 수줍게 쪽지를 숨겨놓지는 않는다. 사람 많은 번화가를 밤새도록 돌아다닐 호기심과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다. 피씨방에서 밤새도록 게임에 미치면서 깔깔깔 서로를 비웃을 우정도 이젠 희미하다. 그렇다고 선행을 베풀며 성탄절의 뜻을 기릴 따뜻한 마음씨와 여유도 사실은 조금 모자르다. 24일은 방학이 아니라, 칼퇴만 할 수있길 바라는 평일이니깐.
그래도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왜냐고?
이제는 더 이상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이니깐. 24일은 우리에게 출근하는 날이고 25일은 오랜만에 찾아온 꿀맛같은 휴일이다. 올해 마지막 찾아온 이 꿈같은 휴일을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보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날이다. 연인이라면 맛있는 저녁 식사도 좋고, 솔로라면 나만의 공간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념할 수 있는 영화를 보는 것도 좋다. 기대감을 내려놔야 매년 돌아오는 이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낼 수 있기에.
참고로 나는 올해 크리스마스에 집에서 20년 전 영화를 봤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톰 행크스의 츤데레는 류준열을 팔목 힘줄을 초월하는 근사함이 있고, 맥 라이언의 모성애는 족히 20년은 되돌리는 따스함이 담겨 있다. 2015년 나의 크리스마스는 평범한 휴일처럼 노멀했지만, 방에서 조용히 맥주를 홀짝거리며 보았던 '시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 덕분에 기억에 남을 거 같다. 기억에 남는 경험은 특별한 액티비티가 아니라 새로운 emotion을 느끼는 게 아닐까.
그러기에 올해 특별하지 않은 성탄절을 보냈다고 생각하는 모든 연인을 비롯한 솔로에게 얘기하고 싶다.
I wish your normal and your own special Christmas every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