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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범 Sep 14. 2024

메디아 루나 - 오쵸 15

엘리아나는 액정 위로 떠오르는 이름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름을 확인하더니 큰 고민 없이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너머로 루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아나 님, 지금 어디세요? 혹시, 홍대 세요?]     


"네, 지금 저 데이빗 님하고 같이 홍대에서 식사 중이에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갑자기?"    

 

[오, 타이밍이 아주 좋군요. 데이빗 님도 같이 가면 되겠네요. 아니, 저번에 제가 주말에 하는 밀롱가에 대해서 이야기드린 거 기억하시죠? 아무래도 오늘이 타이밍인 것 같아서 연락드렸어요. 메시지는 확인을 안 하시는 거 같아서 바로 전화드렸습니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그의 목소리는 내게까지 들려왔다. 밀롱가를 가자는 그의 제안에 엘리아나는 어딘가 혹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둘만의 시간이 방해받는 것 같아 불쾌했지만, 느낌상 그녀는 이 제안을 수락할 것 같았다.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녀는 잠시 전화를 귀에서 떼고 물었다.    

 

"데이빗 님, 밀롱가에 가보신 적 있으세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요, 저는 아직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요. 밀롱가가 정확히 뭘 하는 곳이죠?"

대략적인 내용을 찾아봤었지만 가고 싶지 않았기에 모른 척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오히려 잘 됐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밀롱가는 사람들이 모여서 탱고를 추고, 소셜도 즐기는 곳이에요. 탱고를 배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가면 재밌을 거예요. 저도 몇 번 가보지는 못했지만 갈 때마다 즐거웠어요. 다음에는 다 같이 가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데이빗 님이 함께네요. 이거 마치 운명 같은데요?"

엘리아나가 운명을 강조하며 말했다. 내가 했던 말을 인용하며 장난을 치고 싶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마냥 웃음이 나는 상황은 아니었다.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만, 엘리아나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무언가 불 보듯 뻔했다. 루크에게 기회를 줄 수 없었고, 그녀를 지켜야 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오늘은 그곳에 가야만 했다.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듯하자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아직 안 가봤다면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꼭 함께 가봤으면 해요. 거기서 다시 시작되는 우리 파트너십을 축하해야죠."

가야한다 쪽에 무게가 실리던 차에 그녀의 말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낯선 공간이었지만 그녀와 함께라면 두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핸드폰 너머 루크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내 속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단순한 초대가 아니었다, 무언가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좋습니다, 한 번 가보도록 하죠. 해보지 않은 걸 해보는 건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요." 

나는 루크가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엘리아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 너머로 잘 됐네요, 하는 루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루크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한참을 설명했다. 그녀는 즉시 장소를 확인하며, 루크의 지시를 따랐다. 밀롱가 장소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았고, 나는 그녀의 옆에서 서서히 불안을 느꼈다. 밀롱가가 열리는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어 우리는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전화를 끊으니, 마치 불청객이 물러난 것처럼 마음이 잠깐 편해졌다. 

엘리아나와의 대화를 이어가려는 찰나, 그녀가 자연스럽게 밀롱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주제가 바뀌자 대화의 분위기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말하는 내용에 집중했다. 엘리아나는 나를 위해 밀롱가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밀롱가에서 춤을 추는 방법이나 규칙들을 마치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는 듯했다. 특히, 그녀는 론다와 까베세오에 대해 강조했다. 론다는 춤을 추는 공간을 의미하며,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야 한다고 했다. 이 규칙을 어기면 다른 사람들과 충돌할 수 있다며, 밀롱가에서 예의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까베세오에 대해서도 열심히 설명했다. 까베세오는 말로 춤을 신청하는 대신, 눈빛을 통해 상대방과 교감하는 방식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서로의 의사를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그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바라보며, 상대와 눈이 마주치길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서로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서로를 확인하고, 춤을 추겠다는 의사를 확인해야 했다. 


만약 그러한 매너를 무시한 채 직접 다가가서 손으로 춤을 신청하거나, 말로 춤을 신청하게 되면, 밀롱가에 다시 발을 못 붙일 수도 있다고 겁을 줬다. 엘리아나는 이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밀롱가에서 외면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밀롱가는 단순한 춤의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암묵적인 규칙과 매너가 중요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밀롱가에 대해 설명하는 내내 반짝였다. 밀롱가에 가는 것에 굉장히 신이 난 느낌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는 설레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저 춤을 추는 것뿐 아니라, 그곳에서 벌어지는 소셜 경험 자체가 그녀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달랐다. 그곳에 우리 둘만 가는 게 아니라 루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그래도 루크마저 없었다면, 둘이서 그곳에 갈 일조차 없을 것이었기에 오늘만큼은 루크에게 고마워기로 했다. 마음을 정리 하지 않으면 그에게 화를 낼 것만 같았다. 내게는 준비가 필요했다. 그를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마음속에서 시물레이션을 했다. 적어도 그녀 앞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다시금 다짐하며 마음을 다잡을 때쯤, 시간이 다가왔다. 엘리아나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가방을 정리했다. 문을 나서기 전, 가방 안에 탱고화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다행히 챙겨 온 신발이었다. 이 작은 준비가 오늘 밤 엘리아나를 위한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식당을 나와 팔 분 정도 걸어가자, 루크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반갑게 인사하는 그의 모습이 그리 달갑진 않았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엘리아나는 그에게 다가가 반가운 포옹을 나눴다. 그 정겨운 포옹이 오늘따라 나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그와 가볍게 포옹을 나눈 뒤, 우리는 그가 안내하는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서는 이미 탱고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는 밀롱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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