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연 Aug 30. 2023

삶의 끝에 머무는 자리

그곳이 요양원이 아니기를.....

옆동 할머니가 요양원으로 가셨다.

13년 전 내가 현재의 우리 집으로 이사 왔을 때 사람들은 할머니를 가리키며 90이 다 되셨다고 했다. 작지 않은 체구에 새하얀 머리, 청바지가 꽤나 잘 어울리던 그녀는 환한 미소와 꼿꼿한 걸음으로 주변 어른들께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90대 할아버지와 90이 다 된 할머니, 그렇게 두 분만 살고 계셨는데 몇 해 전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자 홀로 남게 된 할머니에게 몹쓸 치매가 찾아왔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계시던 따님이 매일 아침에 오셔서 주간보호센터 차량을 이용하시도록 도왔다. 할머니 혼자 밤을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고 걱정되었지만 굳이 알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그저 혼자 계실만하니 계시지 않겠냐는 바람만 있을 뿐.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댁 앞에 낯선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보였다. 이어 동네 회장님 격인 아저씨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전해주셨다. 할머니가 요양원에 가신다고. 나도 모르게 울컥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맺혔다. '결국 삶의 끝에 머물 곳은 요양원인가?'


공동주택이 지어진 1989년에 입주하신 할머니는 당신 삶의 끝까지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으셨을까? 하지만 혼자 사시는, 100세가 다 되어가는 그녀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이 해소되지 않은 채 인생의 끝은 요양원인가 하는 생각만 날큰해져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엄마는 오래전부터 '요양원에는 절대로 가시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다. 나 또한 '자식이 엄마를 모시는 게 당연'하다고, 그게 '자식 된 도리'라고 생각했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어쩌면 어릴 적부터 당신을 모실 자식은 동생이라며 대놓고 편애를 하셨기 때문일까? 그래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하지만 거동이 힘들어지신 엄마는 내게 오셨다. 엄밀히 말하면 엄마의 의견은 묻지도 않은 채 모셔왔다.


편찮으신 엄마를 돌보기 위해 엄마 댁으로 가는 것이 몸도 편치 않았지만 마음이 너무 힘들어 모셔오게 된 것이다. 이게 잘 한 선택인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주변에서는 모두들 잘한 일이라고 하신다. 친척분들은 물론 엄마 친구분들 까지도.

애당초 잘할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잘하지도 못하면서 힘듦은 상상을 넘고있다.


우선 우리 집에는 아직은 돌봄이 필요한 중학교 2학년 딸아이, 남편과 나,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엄마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기 전 가장 걸리는 건 아이였다. 한참 예민한 시기에 나의 부족함으로 오히려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처음 2개월은 단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한 가슴속 그 무엇을 토해내지 못한 채 내 뺨을 백대도 넘게 때렸다. 얼얼했다. 차라리 소리 내어 울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둘러봐도 그럴만한 곳이 없었다. 의무만 남지 않기를 바라는데 의무만 남을까 봐, 존중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게 될까 봐 내 자신이 두려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엄마와 같은 방을 사용하며 엄마의 부름이나 작은 소리에도 재빠르게 움직였다. 행여나 남편과 딸아이의 곤한 잠을 방해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새벽 2~3시. 엄마의 부름에 빠진 잠에서 한순간 튀어나와 몸을 일으킨다. 모른 척 자고 싶기도 했지만 나 외에 또 다른 가족이 힘들기를 원치 않기에 그냥 누워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번 잠에서 깨면 잠을 이루기 어려운 나는 날이 더할수록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것 같은 피곤함으로 눈물은 점점 늘어갔고 나의 미래가 오버랩되면서 늙는 것 자체가 무서워졌다.


낮이라도 다르지 않아 엄마는 내가 시야에서 멀어지면 여지없이 찾으신다. 설거지를 할 때도 식사준비를 할 때도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엄마를 모셔온 후(2개월 동안)의 단계는 이랬다.

1단계. (모시고 오면서)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자. 다만 목표가 있었는데 엄마가 혼자 걸으실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바싹 마른 몸에 살이 붙도록 하는 것이었다.

2단계. (모셔 온 후 1주일쯤 되었을까?)

내가 잠을 못 자니 하루하루가 지옥 같다.

3단계.

늙는 게 무서워졌다.

(누구나 올 수 있는 일,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걸 확인하면서 엄마가 잃어가는, 잊어가는 많은 것들에 나는 무너질 것 같았다.)

4단계.

내 아이가 걱정되었다.

내가 늙는 게 무서워졌듯, 내 아이가 혹여라도 어른이 되는 게 싫어질까 봐 두렵다.

(부모가 아프면 자식이 모셔야 하는 것을 내 아이는 당연함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5단계.

나는 요양원이나 시골에서 살기로 했다.

(내 아이가 나와 같은 힘듦을 모르게 하고 싶기에 나와 같은 마음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이에게 말했다. 나중에 시골에서 살 거라고 그러니 혹시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아직 못다 한 말은 요양원도 괜찮다는 것. 다만 내가 어린이집을 많이 알아보고 너를 보냈듯이 많이 알아보고 좋은 곳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련다.)

6단계

다시 엄마의 입장이 되어보았다.

(엄마의 시간이 너무 무료하게 느껴졌고, 사회성이 필요한 시기에 아이를 돌본답시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방치다.)

7단계

혼자 하지 않기로 했다.

(요양보호사나 주간보호센터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인근의 주간보호센터를 방문해 상담을 받으며 선생님들의 생각이나 알맞은 공간과 시설을 탐색해 믿을만한 곳을 찾기로했다.)




겪어보니 치매는 매우 힘든 병이다.

단적으로 예를 들면 이렇다.


"엄마! 설거지하고 올라올 테니까 나 부르지 마!"

다짐에 다짐을 받았지만 5분이나 지났을까? 여지없이 부르신다. 한두 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엄마 앞에 서지만 세 번째부터는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내 말투와 표정이 곱지 않다.

"엄마! 나 지금 설거지한다니까~ 엄마가 대신 설거지 해 줄 거 아니잖아. 내가 얼른 하고 올 테니까 나를 제발 부르지 마. 엄마가 불러도 절대로 안 올라올 거야!"

하지만 엄마는 나를 또 부르신다.

절대로 올라오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지만 혹시라도 지금 아니면 안 될 일이 생겼을까 봐 씩씩대면서도 꾸역꾸역 올라가 엄마 앞에 선다. 정말 별 일 아닌 일이 대다수라 한숨이 동반되는데 식사도 마찬가지다.


잘 드실 때도 있지만 입안의 음식물을 씹지 않으시고 꾹 다물고 계시면 어르고 달래고 급기야 엉엉 울며 드시라고 말씀드린다. 그래도 안 드시면... 이제 안 드릴 거라고 한마디 더 하지만 그게 또 안 드시면 안 되니까 계속 반복이다.


그럼 화장실은?

엄마가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하신다.(화장실, 때론 변소)

"엄마 화장실 고 싶으세요?"

"화장실이 뭐야?"

분명히 화장실 가신다고 해놓고 화장실이 뭐냐니... 나도 모르게 한숨 한 번 내쉬며 "변소"라고 말씀드린다.(학습의 결과로 처음엔 미칠 것 같았다.)

"응.(때론 네)"

변기에 앉혀드린 후 소변보라고 말씀드린다.

"......."

"오줌 누라고"

"오줌 누라고.... 어떻게?"

"엄마~! 쉬 하라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시거나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말씀하신다)"

이게...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지만 사실이다.

"소변보시라고요~"

"아~ 소변보라고~!"

(매번 이러시지는 않으니 엄마 따라 나도 오락가락한다. 그저 화장실을 가리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로 한다.)


엄마의 치매증상을 나열하는 것은 치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함이다. 매일매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부딪히며 치매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자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아직 닥치지 않은 일들이 많겠지만 엄마와 나는 노력중이고 조금씩 좋아지시고 있다.

치매에 대한 이해 덕분이 아닐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가 넘어지셨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