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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 Aug 01. 2021

단편소설 <게르다의 사랑> - 안데르센 공모전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아서

겨울을 닮은 여인이 있었다. 매서운 추위에 동물들이 숨어버리듯, 그녀의 자태를 본 사람은 신비로움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 얼어붙을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차가운 여인. 사람들은 그녀를 눈의 여왕이라 불렀다.


아름다운 여왕의 소문을 듣고, 자신이 그녀에게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주겠다며 호기롭게 도전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관능적인 외모에 박학다식하기까지 했던 여왕은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마을에서 가장 잘생겼다는 사람이 그녀를 유혹하기도 했으며, 똑똑하기로 저명한 이는 지적인 대화를 시도했다. 그중에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도 있었지만, 그 어떤 사랑도 잠시일 뿐이었다. 영원한 사랑을 원했던 여왕은 그 어떤 사랑도 오래가지 못하였음에 실망하고는 성을 떠나버렸다.


여왕은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사람을 찾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가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그녀는 온 마을을 뒤져 특별한 사내를 발견했다. 눈과 심장에 유리 파편이 박힌 그 아이의 이름은 카이였다. 깊게 박힌 유리 파편으로 심장이 차게 얼어붙어있는 한, 카이는 언제든 자신의 곁에 머물 것이다. 눈의 여왕은 차가운 입맞춤으로 단숨에 카이의 영혼을 홀렸다. 그리고 카이를 데리고 성으로 돌아왔다.





나는 사라진 카이를 찾으러 나서기로 했다. 강물이 카이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소문을 어렴풋이 들었다. 나는 가장 아끼는 빨간 구두를 신고 강가로 향했다. 계곡에 도착해서 강물에게 말했다.

"카이가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면 이 빨간 구두를 줄게."

카이를 찾기 위해 아끼는 구두를 내어놓는 순간, 불쑥 카이가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언제까지고 함께하자던 카이의 약속은 다 거짓이었을까. 지금 나는 이렇게 카이를 위해 희생하는데, 그는 그저 관능적인 여왕의 외모에 이끌려 가버린 거겠지. 카이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보낸 건 나였다. 그럼에도 그가 여왕에게 첫눈에 반해 따라가버린 건 나의 에로스적 매력이 떨어진다는 방증인 것 같아 몹시 불쾌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카이를 찾으러 가는 걸까. 그를 만나게 된다고 한들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어쨌든 나는 카이를 찾으러 가야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를 찾아야 한다는 것 외에는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물살에 떠밀려 강에 빠졌다. 그때 한 노파가 나타나 나를 구해주었다. 나는 노파의 집에서 몸을 말리면서 노파가 예쁜 접시에 담아온 버찌를 먹었다. 버찌를 먹는 순간, 카이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흐려져갔다. 아이를 무척 갖고 싶었던 노파는 나를 애지중지하며 잘 대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노파의 어여쁜 딸이 된 것이다. 그렇게 노파의 집에서 몇 달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강물에 떠밀려온 빨간 구두를 발견하고 나는 카이를 떠올렸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나는 노파에게 깜빡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파는 당신의 즐거움을 위해 나를 이용했으며, 나의 진정한 행복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노파가 무척 미웠다. 그녀는 나를 골려주고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나는 분해서 눈물이 흘렀다. 세상 사람들은 그 어떤 연인에 대한 사랑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에 견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만큼 어버이의 사랑은 가장 순수하고도 무한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처럼 어리석은 게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다. 노파는 나의 어버이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노파는 당신의 인생에서 느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나라는 존재가 필요했던 것뿐이다.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상대를 보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간단히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했다. 하지만 정작 노파의 곁을 떠나게 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럼에도 내가 노파를 미워할 수 없는 까닭은 당신이 나를 위해 들인 정성과 헌신이 거짓된 사랑은 아니었음을 알기 때문이었으리라.





궁궐로 가는 여정에 재미난 까마귀 한 마리를 만났다. 까마귀는 굶주린 내게 빵을 건넸고, 여왕이 카이를 데리고 갔다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나와 그는 친구가 되었다. 까마귀는 궁궐까지 가는 길에 동행해주기로 하였다. 까마귀는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걸까. 까마귀와 나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보다는 우정에 가까울 것이다. 까마귀에게는 연인이 따로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나에게 충분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과정에서 전혀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까마귀가 늘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때론 까마귀에게 애인이 1순위라는 것이 퍽 질투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까마귀가 내 연인이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까마귀에 대한 나의 마음은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우애적 사랑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그 표현만으론 다 담을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까마귀와 함께 숲을 지나는 길에 산적의 습격을 받았다. 산적 무리는 나를 잡아서 묶고 우리 안에 가두었다. 다행히 날개가 있는 까마귀는 쉽사리 도망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였다. 온몸이 밧줄에 묶인 채 나이 든 여자 산적이 나에게 칼을 내리꽂으려는 순간, 산적 딸이 그녀를 제지했다.

"나 쟤가 맘에 들어! 나 쟤랑 놀 거야!"

그 후로 산적 딸은 나를 장난감인양 거칠게 대했다. 내 팔을 힘껏 잡아당기기도 하고, 얼굴에 비둘기를 툭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치 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듯했다. 산적 딸은 늘 나를 품에 안고 잠들었다. 내가 잠시라도 사라지면 짜증 섞인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내가 네 옆에 있는 한 사람들이 너를 해치지 않을 거야."

산적 딸이 내게 속삭였다. 나는 어쩌면, 이 아이 덕분에 내가 생명을 지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이 아이는 나를 그렇게 각별하게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이 아이의 사랑은 한낱 유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여느 날처럼 함께 잠자리에 든 산적 딸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카이의 행방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녀는 나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들어주었고,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산적 딸은 기르던 순록을 우리에서 꺼내 궁궐까지 나를 태우도록 했다. 그녀는 나와 카이의 행복을 빌어주며 손을 흔들었다. 지금까지 나를 가지고 노는 대상쯤으로 여겼던 이전의 그녀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녀의 눈빛은 예전보다 차분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어쩌면 저게 그녀의 본모습일지도 몰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산적의 딸은 나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거칠게 대한 것이다. 나는 눈물이 쏟아졌고, 그녀는 덤덤하게 나를 다독였다. 나를 각별하게 여겼던 그녀가 곧바로 나를 떠나보낼 때, 알 수 없는 서운함이 밀려왔다. 산적의 딸은 전혀 슬픈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긴 했던 걸까? 사람들은 집착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일말의 미련도 없는 산적 딸의 태도는 가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곁에 있고 싶다는 최소한의 마음마저 없다면, 그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은 사랑보다는 인류애에 가까운 것이리라. 어쩌면 그렇기에 가장 순수한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카이를 내 곁에 둘 수 없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그의 행복을 응원할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카이를 찾아야만 한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나는 산적 딸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했다.





이윽고 여왕이 사는 성에 도착했다. 성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자 카이가 보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러나 카이는 냉담하게 나를 외면하고는 여왕의 뒤로 숨어버렸다. 여왕은 흥미로운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여왕에게 카이를 되찾으러 왔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왕은 나에게 물었다.

"카이는 너에게 어떤 의미지?"

"카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사람들은 쉽게 사랑을 말하곤 하지."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여왕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든 것은, 뒤에서 나를 차갑게 응시하는 카이의 눈빛이었다. 그것은 무서우리만치 서늘하게 느껴졌다. 여왕은 싱거운 미소를 지으며 준비가 되면 다시 오라는 말만 남겼다.



나는 궁궐 밖으로 내쫓기듯 떠밀려 나왔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했다. 나에게 카이는 어떤 의미인 걸까. 내 사랑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지난날 마주했던 무수한 사랑들을 떠올렸다. 노파, 까마귀, 산적 딸,... 그리고 카이. 나는 불쑥 순록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니?"

"나는 산적의 딸을 사랑해."

순록은 맑은 미소로 답했다.

"그런데 왜 그녀를 떠나서 나를 도우러 온 거야?"

"나는 그녀를 떠난 게 아니라, 그녀가 나에게 자유를 준 거야."

순록의 말에 나는 의아했다.

"산적 딸은 너를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에 가둬뒀는데, 밉지는 않아?"

순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론 우리 안은 참 갑갑했지만, 그게 그녀를 싫어할 이유가 되진 않아."

나는 밤새 순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함께 밤하늘의 오로라를 바라보며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날이 밝고, 나는 성으로 향했다. 다시 여왕을 만났을 때, 그녀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 눈빛은 어떤 기대감을 품은 동시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이 깃들어 있는 기묘한 눈빛이었다. 여왕은 지난번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너에게 카이는 어떤 의미지?"

카이는... 나는...




조심스레 나의 입이 열리며 입술 사이로 말이 혀끝에서 흘러나왔다. 그 순간, 카이의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옛 기억에 카이는 눈물을 흘렸고, 그의 눈에 박힌 파편이 빠져나왔다. 차갑게 얼어붙은 심장은 뜨거운 눈물에 녹아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눈의 여왕은 카이가 흘린 눈물을 모아 투명한 유리병에 담았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는 사라졌다. 성 밖을 나와보니 어느새 봄이 찾아왔고, 우리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매년 첫눈이 오는 날, 눈의 여왕은 특별한 눈을 뿌린다. 카이가 흘렸던 눈물이 허공에서 얼음이 되어 눈으로 내리는 것이다. 그 눈의 결정은 카이의 눈동자와 닮았다. 사람들도 그 눈의 특별함을 알아보고는, 좋아하는 사람과 첫눈을 함께 맞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추운 겨울, 여왕은 자신이 흩뿌린 눈을 바라보며 게르다의 대답을 떠올리곤 한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사랑의 의미를 찾아가는 게르다의 성장소설로 바꾸어 창작해보았습니다.

원작자인 안데르센은 사랑의 의미를 기독교적 관점의 '헌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카이에 대한 게르다의 태도는 정말 무한 긍정과 신뢰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원작과 달리 저는 좀 더 현실적인 게르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때론 카이를 미워하고, 사랑의 의미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도 하지요. 현실에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미성숙한 애착도 존재하니까요. 또한 같은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그 방식은 무수히 다양합니다. 이런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노파, 까마귀, 산적의 딸, 순록 등의 등장인물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마지막 여왕의 물음에 대한 게르다의 대답은, 고심해서 썼다가 지웠습니다. 그 부분은 각자의 상상에 맡기는 편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저로서는 그에 대한 대답이 있지만, 타인의 그것과는 또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답을 찾아나가는 것이 진정한 성숙한 사랑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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