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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화분을 위한 고요

by 아홉개의 방

텅 빈 방의 문을 열었습니다.

오래 묵은 먼지 대신, 오후 네 시를 닮은 햇살이 먼저 저를 맞았습니다.

열린 창으로는 서걱이는 바람이 불어왔고, 어디선가 갓 구운 빵의 온기가 섞여 있었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그 공간의 한가운데 가만히 섰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들여놓을 화분의 자리를 가늠해 보았습니다.


비어 있다는 것은 때로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입니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공간은, 무엇으로든 채워질 수 있는 자유를 품고 있습니다.

화분 하나가 놓일 자리를 상상하며 섰던 그 순간, 나는 단순히 방의 배치를 고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이 공간에서 어떤 시간을 살아갈 것인지, 어떤 빛과 바람과 온기를 받아들일 것인지를 선택하고 있었습니다.


시작은 언제나 이렇게 조용합니다.

거창한 선언도, 화려한 계획도 없이, 다만 햇살 한 줌과 바람 한 자락이 먼저 들어온 빈방에서 화분 하나의 자리를 정하는 일.

그것이 새로운 삶을 짓는 첫 번째 손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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