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유연 Oct 23. 2022

지나치게 섬세하면 사는 데 힘이 든다

예민함과 섬세함의 성질과 대처법에 관하여


얼마 전에 쇼핑을 하다 이런 말을 들었다. "너무 섬세해도 힘들어서 안돼~ 적당히 넘길 줄도 알아야지." 좀 전에 봐둔 옷을 구입하기 위해 매장에 다시 왔는데 아까 입어본 그 사이즈가 맞는지 모르겠어 몇 번이나, 꽤 여러 번 다시 입어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내 기준에서는) 꽤 고액의 옷값을 지불한 상태였기 때문에 꼼꼼히 확인하고 싶었다. 지적받은 느낌에 약간 불쾌한 기분도 들었었던 것 같다.


결국 찜찜한 맘을 간직한 채로 그 사이즈의 옷을 가지고 집에 왔다. 그런데 어쩐지 별 거 아닌 그 말이 쉬이 떠나지 않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나한테 꼭 필요한 말 같았다. 매장 직원분의 입을 빌려 삶이 나에게 충고를 해주는 것 같았다. 너무 섬세할 필요는 없다고. 때론 그냥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고 말이다. 이렇게 찜찜함을 느끼는 게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는 '지나친 섬세함'일 수도 있음을, 그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섬세한 건 바람직한가? 남들보다 디테일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잡아내는 능력은 확실한 이점이 있다. 업무상 실수를 줄일 수 있고 무엇이든 높은 완성도로 해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섬세함은 의심이기도 하다. 무언가 놓친 것이 있지 않을까 한번 더 훑어보는 마음에서 섬세함이 생겨나기도 하니까. 혹은 의식하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작디작은 흠을 알아챌 때도 있는데, 이럴 때는 공감받지 못하는 찝찝함을 홀로 감수해야 한다.


어찌 이리 피곤하게 사나. 그냥 받아들이고, 너무 의심하지 말고, 긍정하고, 그러려니 하고, 그럴 수 있거니 하고, 긍정하고, 낙관하며 살고 싶다. 긍정적인 생각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솔직히 매장 직원의 입장에선 얼마나 귀찮고 피곤한가. 아까 입어봤던 옷을 몇 번이고 다시 입어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답답한가.(사실 내 마음에선 아직도 아주 약간 핏이 달랐던 것 같은, 한 사이즈 작은 것 같다는 의심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냥 넘기려고 한다.) 어쩌면 내 직관이 맞았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틀렸다면? 나의 지나치고 집요한 의심 때문에 사이즈가 다르게 느껴졌던 거라면? 얼마나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한 것이며 또 한 사람을 귀찮게 괴롭힌 것인가. 


섬세함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이런 내 성질이 특정 과를 전공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의사나 학자가 되기에는 좋을 것이다. 무언가 연구하거나 창의적인 일을 하기에도 좋다. 관리감독이나 물품 검수, 디자인, 교정 등등 섬세함이 강점이 되는 분야는 수도 없이 많다. 혹은 타인의 마음을 미리 알아채고 살필 수 있기에 꼭 필요한 배려를 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섬세함은 긍정적인 면만 찾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능력은 부정적인 쪽으로 더 자주 발휘된다. 아주 작은 흠조차 찾아내고 사소한 변화에도 민감하다면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까다로울까. 일상생활에서도 부정적인 섬세함이 과하게 발휘된다면 찜찜함을 공감받기보다는 예민한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모든 순간에 마저 이런 섬세함을 발휘한다면 자질 있는 전문가로 거듭나기도 전에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섬세함이 문제가 아니라 섬세함으로 부정적인 면만을 잡아내는 것이 문제인가? 섬세함으로 찾아내는 것들이 모두 긍정적이라면 피곤한 사람이 아니라 낙관적인 사람이 되는 걸까? 




아무튼 간에 요즘 생각한 것은 이러하다. 남들보다 조금 더 섬세한 사람이라면 섬세함을 표현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가 부정적인 것을 발견해 냈다고 그것이 꼭 기분이 될 필요는 없으며 내 기분이 동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타인에게 떠넘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 또 어느 정도는 내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나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 필요도 있다. 지나치게 섬세하면 사는 데 힘이 드니까, 힘을 좀 빼고 살아 보자는 것이다.


선천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공감할진대, 자극의 종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찾아드는 자극에 피곤해지고 불쾌해지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자극에 대한 태도와 행동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성인이지 않은가. 더 이상 성격이라는 이름으로 핑계 댈 수 없다.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내 주변과의, 사람과의 관계는 나 하기에 달린 것이다. 내가 가진 성질을 잘 파악하고 다스려야 한다.


때로는 남들은 나만큼 예민하지 않다고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어감이 조금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내가 예민한 것이 사실이라면 인정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낫다. 조금 더 힘 빼고 유연하게 살자. 여유롭게 살자. 쉽지 않더라도 내 인생이고 내 삶이니까. 소중한 내 사람들이니까. 나 자신과 주변인을 위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