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자존감에 관한, 그러나 실은 연애에 관한 이야기
자신이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점이 많은 일이다. 특히나 그것을 지나치게 자주 표현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자신의 모자람을 만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생각이 자연스레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게 될 테니 둘(생각과 행동)을 같은 것으로 간주해 보자. 이때의 단점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타인에게 무시당하게 된다.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에게 존중받지 못한다. 많이 들어본 말일 것이다. 삶을 살다 보면 그것이 사실임을 종종 체감한다. 자꾸만 스스로를 낮추는 말을 하는 사람을 대하다 보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그 말에 반박하며 그 사람을 격려해 준다. 그러나 한두 번이면 몰라도, 몇 번을 반박해도 기회가 될 때마다 나는 이게 모자라, 나는 이게 이래서 안 돼 같은 기운 빠지는 말만 계속 돌아온다면 이내 들어주는 사람도 지치게 된다. 격려도 귀찮아지고 무의식적으로 정말로 그 부분은 모자라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모자란 사람'임을 끊임없이 말하며 상대에게 최면을 걸고 있는데.
스스로의 단점을 습관적으로 어필하는 사람은 그것을 타인에게 부정당하고 싶어서 그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모자라지 않다고 말해줘. 내가 잘하고 있다고 말해줘. 그 말을 듣고 싶어서 자신을 낮추는 방식으로 타인의 대답을 유도하는 것이다. 타인은 바보가 아니기에 그 의도를 모두 느낀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원하는 대답을 해 주겠지만 모두가 그런 친절을 베풀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연인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최근 연인에게 고민 상담을 많이 했다. 나는 약간의 도덕적 결벽증을 가지고 있고 그걸 인정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다. 모든 것이 옳을 수 있음을 이야기하지만 실은 모든 것을 옳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나의 유연성을 인정해 주길 바란다. 나는 그런 이기적인 심리를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내 욕심에 고민 상담을 빌미로 '유도하는 말하기'를 시전한다.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 갈등한 것을 '나의 부족함'으로 말하고,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했던 '미숙함'으로 표현한다. 마치 교정당해야 할 일인 것처럼.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상대의 입장에서 나를 보자. 부족함을 이야기하는 내가 진짜로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가 보인다. 그 말을 해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해 준다. 상대의 말에 나는 티 내지 않으려 하면서도 묘한 만족감을 느낀다. 상대에겐 그게 모두 보인다.
아, 이것은 상대의 입장에서는, 타인을 좌지우지하는 경험이다. 타인의 머리 위에 서는 경험이다. 그 감각은 인지하기 어려운 묘한 관계의 권력을 만들어낸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타인에게 나는 속마음이 그대로 보이는 사람이 된다. 다루기 쉬운 사람이 된다. 그러다 언젠가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이런 생각이 들 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원하는 말을 듣지 않으면 스스로 만족할 수는 없는 사람인가. 꼭 내가 말해줘야만 스스로의 의견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건가? 말해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내가 없으면 넌 아무것도 못 하겠구나. 너는 내가 필요하겠다. 나니까 받아주는 거지. 안 그래?
애초에 고민 상담이라는 것 자체가 이 상황을 나 스스로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이다. (혹은 그저 감정적 지지자가 필요하거나.) 즉 타인에게 해결책을 부탁하는 행위이다. 이게 너무 자주 일어나게 되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언제나 타인에게 해결을 떠넘기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너무 잦은 고민 상담도 스스로의 모자람을 표현하는 것이거나, 스스로 모자라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던 것이 표출된 결과일 수 있다.
(애초에 정말로 타인의 의견을 구하기 위한 고민 상담과 내게 필요한 말을 해달라는 식의 고민 상담은 좀 다른 용어로 불러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그가 인정해줘야만 솟아나는 자존감이라면, 그가 거부한다면 마음에서 샘솟는 것은 무가치함과 분노뿐일 것이다. (이 분노는 못난 스스로를 향한 것일까, 아니면 뜻대로 해주지 않는 상대방을 향한 것일까?) 결코 건강한 상태가 아님을 인지하면서도 연인의 인정이라는 쉽게 얻어지는 달콤한 쾌락에서 벗어나는 건 너무 어렵고 싫은 일이기에. 그렇기에 쉬운 길을 택한다.
스스로를 똑바로 직면한다면, 나를 낮추는 말과 타인이 그것에 반박해 주기를 바라는 심리의 종합이 타인을 수단으로써 이용하는 행위임을 알 것이다. 그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더라도 말이다. 또 그게 나쁜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다음으로 넘기고서라도 우리는 종종 그럴 의도로 서로를 이용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유대를 형성하고 격려받을 수도 있겠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의존의 수준으로까지 갈 수도 있다.
또한, 부족함만을 생각하면 기분이 우울해진다.
그야 내가 여기저기 부족한 곳만 가득하다면 나 자신에게 만족할 수가 없을 테니까. 그래서야 어떻게 삶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 자체로 마치 잘못 태어난 것마냥 우울해진다. 매사 우울한 사람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방출하고 스스로와 타인 모두를 오염시킨다. 그다지 도움 될 곳이 없는 자기연민에 빠지고 만다. 모두에게 나쁜 결과다. 그것이 병적인 수준으로까지 이어진다면 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스스로의 단점을 인지하는 것이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다.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결핍을 앎으로써 발전할 수 있고, '부족하다는 감각'은 이를 채우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또 누구나 분명 부족한 부분이 있고 말이다. 그러나 그 생각이 과해지면 이득과 손해의 분기점을 넘어가고 마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특히 표현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표현하면 할수록 장기적으로는 내가 원했던 정 반대의 결과만 낳게 될 뿐이니까.
그럼 결론적으로 - 대체로 내가 모자라기보다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롭다.
스스로를 낮추는 말은 의도적인 겸손함이 아니라면 구태여 많이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 너무 잦은 고민 상담 역시 조심할 필요가 있다. 정말 모자란 것 같으면 가능하다면 속으로만 생각한다. 그럴 체력이 남아 있는 날만이라도 그럴 용기를 내 보자. 그리고 그 모자람을 채우고 싶다면 그러기 위해 나 스스로 노력한다.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여정의 주축은 당연하게도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내 지분이 90%여야 한다. 스스로 우뚝 서야 한다.
나 자신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때로는 당당하게 나를 판단의 기준점으로 삼아야 한다. 기꺼이 그래야 한다. 좀 더 대범해도 괜찮다. 눈치 보지 말고. 비굴하지 말고. 심지어는, 때로는 내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나의 판단을 인정해 주어라. 거기서 도덕적인 가치를 논하지 말고 내가 내 판단을 좀 인정해 주라는 말이다. 왜 타인의 평가에 그렇게 좌지우지되면서 내 판단에도 근거와 맥락이 있음을 이해해주지 않는가? 나도 저 사람만큼 충분한 사람이지 않는가? 그런 관점도 존재할 수 있는 거다.
결론은 이렇게 명명백백한데도. 내가 쓰는 글들은 참 많은 경우 내가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방증이다. 생각하는대로 사는게 원래 어려운 것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실천해 본다면 마무리를 이렇게 해 볼 수 있겠다. 위 문장부터 긍정적으로 바꿔 보자. 내가 쓰는 글들은 참 많은 경우 내가 어떻게 살아왔음을 자각하는 통찰이다. 나는 이를 계기로 바뀌어갈 것이다. 지금 당장 결론대로 살고 있지 못하더라도 나는 충분히 잘하고 있고 잘 해낼 것이다. 발전해 갈 것이다. 멋진 일이다.
그리고 뭐 사람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어. 당장 다음 해에 이 글을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반박할 것 투성이일지도 모르지. 그럼 그 때 반박하면 된다. 자꾸 부족한 점만 보려고 하지 말자. 지금 이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