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몇 살이에요?
건강한 호기심을 환영합니다
학원에서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공부를 잘 하는 방법도 아니고,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아니다. 지금까지 수백 번 들어본 질문은 따로 있다.
“선생님은 몇 살이에요?”
그럴 때마다 나는 머리를 굴린다. 정신없는 수업시간, 떠들고 딴짓하던 아이들도 내 대답을 듣기 위해서 나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나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말하곤 하는데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초등 저학년 버전은,
“선생님은 백 살이야.”
고학년 버전은,
“너희랑 별로 차이 안 나. 스무 살이야.”
때때로 나는 삼백 살, 오백 살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할머니라고 부르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조선시대에서 왔냐고 놀리기도 한다. 날카로운 친구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얼굴 생김새 보니까 삼십 대는 안 된 것 같고 이십 대 중반인가요?”
내가 계속 안 알려주자 초3 영민이는 귀여운 협박까지 내놓았다.
“괜찮아요. 쌤이 안 알려주시면 네이버에 치면 돼요. 네이버에 칠까요, 아님 지금 말하실래요!” (영민아. 쌤이 꼭 유명해져서 네이버에 검색하면 나이가 뜨는 사람이 될게…….)
학원에서 일하기 전까지 누군가 나를 이렇게까지 궁금해한 적이 있었나. 관찰력이 좋은 현이는 내가 텀블러를 안 쓰고 종이컵을 쓰는 날에는 ‘선생님 또 믹스커피 두 봉 타 마셨죠!’ 하면서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섬세한 어린이들 같으니라고.)
나는 사실, 주목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다. 나에 대해서 누군가 왈가왈부하는 것이 싫다. 어느 정도냐면 타인의 꿈에 내가 나오지 않는 ‘꿈 차단 기능’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의 관심과 질문은 싫지가 않다. 가끔 묻는 짓궂은 질문에도 유연하게 대처하고 싶은 생각뿐, 불쾌하지 않다. 아이들의 질문은 어른의 질문과 무엇이 다를까.
아이들의 질문에 대한 책임감이 어른과 다르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야 마는 나와는 다르다. 내 대답을 기억하려고 애쓰고, 시간이 지난 후에도 마침내 기억해낸다.
질문만으로도 상처가 되는 순간들이 떠오른다. 한 모임에서 책 읽고 글 쓰는 게 좋다고 밝히자, “근데 그거 쓰면 돈이 되나?” 묻던 사람들, 오래된 연인과의 결혼 의사 여부를 묻고, 아직은 생각이 없다고 말하면 “왜요? 왜 여태 안 해요?” 하며 채근하던 사람들. 호기심보다는 의구심에 가까운 질문들. 질문의 의도가 너무 투명해서 대답을 회피하고 싶던 순간들.
나중에 아이들도, 어른들에게 ‘개인 정보를 묻는 건 실례야.’라고 교육을 받고 질문이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들의 건강한 호기심이 좋다. 나에게로 오는 질문들을, 늘 최선을 다해 대답해주고 싶어진다. ‘너희가 알게 뭐야.’, ‘공부나 해.’ 같은 흔한 답변으로 아이들의 맥을 빠지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여전히 아이들의 관심이 좋다. 그들이 준 관심만큼 수업으로, 따듯함으로 보답하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