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나는 사십일을 계획한 유럽여행 중이었다.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 위치한 몽생미셸에서 가이드 투어를 마치고 나니 밤 열한 시, 투어버스를 타고 파리로 올라가는 네 시간 동안 나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 창밖에는 끝없이 푸른 초원이 펼쳐졌고 곳곳에 포동포동 살이 오른 소들이 여유를 만끽하듯 기다란 꼬리를 흔들어 댔다. 긴 시간 동안 똑같은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늘어졌다. 그 순간,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 시간, 이 풍경들이 새삼스레 생경했다. 차 안에서 지루함을 느끼는 4시간은 곧 과거가 되어 나는 또다시 체코로, 오스트리아로, 이탈리아로 이동해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그 순간을 놓치기 싫었고 수첩을 열어 뭔가 끄적이기 시작했다.
줌파 라히리의 「내가 있는 곳」은 이동할 때마다 느끼는 상념들을 모아놓은 소설이다.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 줌파 라히리는 이 소설을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가 아니라 이태리어로 썼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대체 수필이야, 소설이야? 라고 느껴질 정도로 장르의 정체성이 애매해 보였다. 언뜻 보면 작가의 짧은 단상들을 모아놓은 쪽글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어쨌든 이 책은 46개의 짧은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소설이 맞다.
주인공으로 보이는 사십 대의 여자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주변을 관찰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친한 친구가 나오기도 하지만,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녀는 계속 어디론가 떠난다. 그리고 그녀가 옮긴 공간마다 챕터가 된다. 장소는 물리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마음속의 공간의 역할도 한다.
그녀는 길, 식당, 휴가지, 계산대, 묘소……. 다양한 장소에서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린다. 방 청소를 하다가 이별을 예감하게 했던 첫 남자 친구, 어딘가로 떠나는 것을 ‘돈 낭비’라며 여행을 피곤해하던 고집불통 아버지, 그와 반대되는 성향으로 아버지의 눈치를 보던 어머니……. 그녀는 자신이 처한 고독 속에서 계속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뒷모습만 보이고 있는 닮은꼴 여인은 나에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나이면서 그렇지 않아요, 떠나지만 늘 이곳에 남아 있어요. 이 두 문장은 휙 부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나뭇잎을 떨게 하듯 잠시 내 우울한 마음을 어지럽힌다. p.187
그녀는 환영일지도, 분신일지도 모르는 자신을 닮은 여자에게서 이런 마음을 읽어낸다. 잡히지 않고 사라지는 그녀의 환영처럼 우리도 늘 어딘가로 떠난다. 하지만 잠시 머문 곳의 온기와 냄새, 기억은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우리의 곁을 맴돌 것이기 때문에.
나는 지금 집 근처의 한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커피는 이미 다 마셔버렸지만 삼십 분 뒤에 떠날 예정이며, 내 앞에는 두 여자가 예의를 갖춘 채 불가사리의 아름다움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두 사람은 정말 불가사리를 사랑하는 듯하다. 불가사리가 그렇게 아름다운 생물인가, 호기심이 생겨버렸다. 나 역시, 주인공 그녀처럼 ‘늘 도착하기를, 아니면 다시 들어가기를, 아니면 떠나기를 기다리며 언제나 움직인다.’ (p. 189)
이 책은, 어딘가로 떠날 때 챙겨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시간에서, 내가 있는 그 어딘가에서 느끼는 새로운 감각과 함께, 다시 그녀의 글을 읽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