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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제 올드스 Olds Oct 06. 2023

폴 볼커가 누구야? <2022.8>









“Keep at it”

잭슨 홀에서 나왔던 말. 언론들은 이 말에 주목했다. 그 말을 처음으로 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권총을 지니고 다녔던 거인, 폴 볼커(Paul Volcker, 제12대 연방준비제도 의장)였다. 미팅 이후 한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폴 볼커의 유령이 연준에 돌아왔다.”     




1970년대,

당시 미국 사회는 무기력과 불만으로 가득했다. 당시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미국의 물가지표는 1년 만에 13퍼센트가 상승했다. 휘발유가 부족해 사람들이 주유소에 줄을 섰다. 폴 볼커는 그 시절 끈질겼던 인플레이션이 모든 정책을 무력하게 했다고 회상한다. 미국 사회가 인플레이션이라는 만성적인 병을 앓았던 것이다.           




어느 날 볼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워싱턴에서 대통령을 만날 의향이 있냐는 전화였다. 그는 곧장 워싱턴행 비행기를 탔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그는 세 가지를 말했다. 하나. 연준의 독립성이 절대적으로 보장될 것. 둘, 연준은 인플레이션과 전면전을 벌여야 할 것. 셋, 이전에 해온 통화정책보다 더 긴축적일 것. 짧은 미팅을 마치고 그는 뉴욕으로 돌아갔다. 그는 친구와 식사를 하면서 말했다. 자신이 연준 의장이 될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면담 이튿날 아침 7시, 

잠을 자고 있던 볼커에게 또다시 전화가 왔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었다. 볼커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 연준 이사회 의장 임명에 동의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연준을 믿지 못했다. 

물가 상승률이 연간 15퍼센트에 가까워지는 동안 연준이 과감하게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연준의 실패였다. 폴 볼커는 새로운 해결법이 필요했다. 통화의 가격(이자율)이 아니라 통화량(통화 공급)을 통제하는 전략이었다. 그는 연준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사용했다(재할인율 인상, 은행 지급준비금 의무 적립 비율 확대, 투기성 대출 중지). 금리가 받을 영향을 개의치 않고 통화 공급을 줄이자는 데 집중한 것이다. 물론 자신의 정책이 고통스러울 거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을 그대로 놔둔 다면 가난한 사람이 더 고통받고, 미국의 건강한 경제성장이 멈추고, 결국은 또 다른 경기 침체에 빠질 거란 것도 잘 알았다.          






그는 기꺼이 미움을 받았다. 

실업률이 치솟았다. 농부들은 연준의 빌딩을 트랙터로 에워쌌고, 폐업한 주택 건설업자들은 거세게 항의하며 그를 죽일 거라고 경고했다. 시민단체들도 연준 본부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심지어 한 남성은 연준 건물에 들어가 연준 이사들을 인질로 삼으려는 위협을 했다. 이 사건 때문에 경호원이 배치됐고, 볼커는 옆구리에 권총을 차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또한 폴 볼커가 연설을 할 때마다 시위대가 야유를 보냈고, 쥐들을 풀어놓아 그의 연설을 방해했다. 타임지는 그의 얼굴을 표지로 선정했고 그 밑에 이렇게 썼다. “금리의 고통(Interest Rate Anguish)”. 정치인들과 대통령들의 미움도 받았다. 의회 청문회는 그에게 적대적인 질문을 하고 탄핵으로 그를 위협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연준이 “현명하지 않다”라며 비판을 했고, 레이건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 도서관으로 불러 불편한 기색을 내보였다. 레이건 옆에 있던 비서실장은 “대통령께서는 대선 전에 금리를 인상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라며 그를 당황시켰다. 당시 볼커는 말 한마디 없이 도서관을 걸어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1982년 여름,

마침내 인플레이션율이 뚜렷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통화 공급의 증가세가 둔화되고 있다는 조짐이었다. 그해 말, 실업률은 여전히 10퍼센트에 가까웠지만 경기는 뚜렷하게 회복됐다. 쉽게 금리를 내리지 않고 버틴 연준의 승리가 조금씩 눈에 보였다. 그래도 볼커는 방심하지 않으며 기준금리를 8~11% 수준으로 유지했다. 그가 금리를 낮춘 건 물가가 3%대에 들어선 1985년 5월이었다.           



         

35년이 흐른다.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고 키운 35년. 전쟁과 경제 위기를 극복해온 35년. 연준의 승리 이후 종적을 감췄던 인플레이션이 다시 찾아왔다. 폴 볼커가 말했다. 세계 모든 중앙은행의 본질적 임무는 물가를 잡는 거라고. 2022년 연준에게 이 인플레이션은 분명한 적이며 가장 잔인하게 죽여야 할 적이었다. 인플레이션 앞에서 갈팡질팡하면 패배하고, 볼커처럼 오랜 기간 엄격한 긴축통화 정책을 해야 승리한다는 교훈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폴 볼커가 승리하는 데 5년 9개월 걸렸다. “Keep at it” 제롬 파월은 연준이 인플레이션에 승리할 때까지 쉽게 금리를 내리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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