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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 slow
Nov 05. 2024
환불해줘!
내 노고, 고생, 희생 이거 어떻게 보상할 건데
우승하면 상금이라도 주는 줄 알았더니 배드민턴채 하나 준단다.
개인적인 이야기 잘 안 하는 남편이 카톡으로 이번 주말에 참가하는 배드민턴 경기 일정표를 보낸 걸 보면 꽤나 진심인 듯하다. 요즘 남편 회사에 일이 많아져 힘들어 보였기에 이번 대회는 꼭 우승했으면 했다.
튼튼이 돌 무렵 남편과 함께 유모차를 끌고 집 근처 체육공원을 자주 돌았었는데 거기 있는 배드민턴장도 몇 번 들어가서 구경했었다. 그때 남편의 눈빛이 어찌나 이글이글 타오르던지 당장이라도 들어가서 라켓을 휘두를 것만 같았다. 20대 때 배드민턴에 미쳐서 눈을 감아도 배드민턴 콕에 눈에 아른거렸다고 했었는데 아직도 그 열정이 유효해 보였다. 그때쯤 아이가 밤잠도 일찍 자고 통잠도 잘 자던 시기라, 다시 배드민턴 시작 해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를 했다. 남편은 몇 달 고민하더니 그곳에 다시 가 배드민턴 클럽에 가입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주일에 두 번, 퇴근 후 배드민턴을 치러 간다. 하지만 이번주 일요일에 경기를 나간다는 명목으로, 지난주부터 약속한 날이 아닌 날도 배드민턴을 치러 가고 있다.
"자기야~ 나.. 오늘도 갔다 와도 돼..?"
고개를 비틀어 약간 숙이고 눈꺼풀을 세게 들어 올리며 허락을 구한다. 남편의 말에 '다녀와'라고 시크하게 답했다. 보통 남편이 퇴근을 하면 저녁을 먹고 배드민턴을 치러 가고, 나는 먹은 저녁거리를 설거지하고 집안일을 한 후 아이랑 잠시 놀아주다가 책을 읽어주고는 아이를 재운다. 아이가 두 돌쯤 지나고 나니 내가 집안일을 해도 보채지 않고 혼자 잘 놀게 되어서 남편 없이 보내는 저녁 시간이 그렇게 버겁지는 않다.
시크하게 대답하고 돌아서려다 나의 호의를 권리로 착각할 것을 방지하고자 한마디 덧붙였다.
"오빠 이번에 우승 못하면 내 희생 환불해 줘야 돼!!"
그래도 며칠 연달아 혼자 저녁에 아이를 케어하다 보니 점점 피곤이 쌓여갔다. 조금만 참자 이번주 일요일 경기만 지나면 한시름 돌릴 수 있어! 오빠의 우승을 위한 나름의 희생 카운트 다운을 세며 주말까지 시간이 흘렀다.
경기 당일. 남편의 경기 시간은 대략 오후 2시.
그전까지 푹 쉬어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라고 자유시간까지 선사해 줬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날씨가 추워진다기에, 추워지면 놀기 어려운 집 근처의 '황톳길'로 아이와 둘이 향했다. 황톳길은 따로 입장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녀오면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기 때문에 주말에 아이와 즐기기 안성맞춤이다. 아이가 까르르 소리치며 좋아하자 나도 신이 나 질퍽한 황토에 아이와 함께 두 발을 마음껏 버무렸다.
"요즘 엄마들은 옷 더러워진다고 이런 데 가는 거 싫어하는데, 얘야. 너는 복 받았다!"
대부분 자그마한 아이의 두 발을 귀여워해 주시는데, 한 어르신께서 감사히도 흙투성이의 엄마 발에 엄지 척을 해주셨다. 속으로 나는 생각했다. 저희 남편한테 가서 이야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역시나 아이는 집에 와 점심을 폭풍 흡입하고는 2시간 넘게 낮잠을 잤다. 남편은 경기가 끝날 시간이 되었는데 연락이 없다.
어떻게 됐나 궁금해 낮잠에서 깬 아이를 데리고 체육공원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먼발치에 배드민턴 가방을 메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남편이 보인다. 얼굴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환한 표정은 아닌 듯하다.
"오빠 어떻게 됐어?"
"응? 한 경기 빼고 다 졌어."
"아 진짜?..."
내가 이렇게 희생했는데 지고 오면 내 고생 환불해 달라고 다다다다 따질 셈이었다. 막상 땀에 젖은 남편을 보니 아무 말도 나오질 않는다.
"오늘은 경기장에 먹을 거 많이 없었어? 저번 경기 때 먹었던 김밥이랑 부침개 진짜 맛있었는데..."
나는 괜한 말을 떠들었다.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남편은 온데간데없고,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내 앞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확실히 젊은 애들 스피드는 못 따라가겠다면서..
위로의 말을 왕창 건네고 싶었지만 어쩐지 하나도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아 입 주위만 맴돌다가 속으로 삼켰다.
오빠! 오빠가 이겼어! 걔네는 나처럼 예쁜 마누라랑 우리 튼튼이처럼 사랑스러운 아이 없잖아. 우리가 이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