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나 캐나다에서 1년 살고 싶다고 말을 하면 지인들은 말했다.
"물가가 비싼데 돈을 많이 모아놓았나 봐요."
"한국을 떠나려고 하는 이유가 뭐예요?"
"거기서 지낼 비용이면 제주도나 동남아에서 훨씬 여유롭게 지낼 수 있지 않아요?"
"영어공부를 위해서라면 '엄마표 영어'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 데요."
자연스러운 호기심, 또 맞는 말이다. 돈이 많거나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다. 아이들의 영어의 유창함은 '엄마표 영어'만으로 충분함도 알고 있다. 제주도와 동남아에서의 삶도 낭만적임에 동의한다.
다만 나에게 '북미'는 삶의 다음 챕터를 위한 상징이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하물며 북한까지 족적을 남겼지만 북미는 도전의 땅이었다. 늘 나를 억누르던 영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들도 있지만(필리핀, 싱가포르 등), 나는 그 본토에서 내 영어실력의 민낯을 확인하고 맞짱을 뜨고 싶었다. 아이에게도 배움의 대상으로서 '영어'가 아닌 저절로 습득되는 의사소통으로 자연스레 체득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본토에서 부딪히기로 택했다.
나의 30대,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모든 면에서 녹록지 않았던 워킹맘의 육아기, 그 지루하고 힘겨운 버팀의 기간을 이겨내기 위해 책에 파고들며 줄곧 생각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 아닌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나 스스로가 좋아하는 무엇과 행복한 상태를 알고, 이를 즐길 수 있는 경제적 여유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언어와 생각의 한계가 없는 충분한 사색이 그 삶으로 이끌 수 있다. 언어의 자유는 나의 지경을 무한히 팽창시켜 준다.’
생각의 근력을 키우고, 그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해 아이가 돌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주었다. 같은 종류의 책, 예를 들어 전래동화도 2~3개의 출판사를 골라 같은 이야기를 읽어주었다. 아이는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작가와 출판사에 따라 이야기 전개 방법, 결말, 제목, 주인공의 이름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았다.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스토리나 결말에 대해서 자신만의 논리를 들어 설명을 하기도 했다.
자연에서 식물과 동물에 반응하는 아이, 해변에서 조개껍데기와 바다생물 구경만으로 몇 시간을 보내는 아이, 나무와 풀 사이 곤충을 관찰하며 재미를 발견할 줄 아는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자연과 책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아이로, 내 의도 대로 잘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글로벌 사회의 핵심 언어, 모국어처럼 사용할 줄 아면 그 지경이 무한대로 확장될 영어를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은 어려웠다. '엄마표 영어'가 좋은 교육방법임을 알고 있어서 시도를 여러 번 했지만 번번이 완주를 못했다. 엄마가 성실하게 아이에게 영어를 노출시켜 주는 것이 핵심인데, 어떤 이유에서든 흐지부지되곤 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습득이 되지 않고, 학습의 대상이 된 영어는 부담스러웠다.
내가 갇혀있던 알을 깨기 위해서, 아이의 삶을 위해서. 굳이 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