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with 타입디자이너 채희준
휴대폰을 바꾸자마자 내가 좋아하는 글꼴을 다운받아 설정하고, 미니홈피를 개설하면 무조건 폰트 먼저 구매해 일기를 쓰는 한국인들. '나는 떡을 썰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의 주인공인 서예가 한석봉의 이야기를 줄줄 읊는 한국인들. 교보문고에서 진행하는 글씨대회는 9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한국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글씨의 미학에 진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폰트와 폰트디자이너에 대해선 인지가 부족한 상황. 오늘은 뮤지션 장기하를 담아낸 «기하», 하트시그널의 «초설» 등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폰트를 제작한 타입디자이너 채희준과의 인터뷰를 준비해봤다. 타입디자이너가 된 계기와 폰트를 제작하는 과정, 그리고 장기하와 협업한 자세한 이야기까지.
안녕하세요 희준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채희준입니다. 저는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통해 서체를 제작하는 걸 좋아해요. «청월», «청조», «초설», «고요», «신세계», «탈», «클래식» 폰트를 출시 했고, 2022년에는 작가 오민과 협업한 «오민»을, 뮤지션 장기하와 협업한 «기하»를 출시했습니다.
팀 포뮬라로도 활동하시는데, 포뮬라는 어떤 작업을 주로 하시나요?
포뮬러는 서울을 기반으로 한 디자인 스튜디오로, 그래픽 디자이너인 신건모와 타입 디자이너 채희준이 구성원입니다. 저희는 평소 각자 작업을 하지만, 특정한 경우에는 함께 작업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디자인이나 KBS2 프로그램 더시즌즈의 아이덴티티를 디자인하기도 했죠. 가장 최근에는 전주국제영화제의 연계 행사인 100 Films 100 Posters의 큐레이터를 맡고, 아이덴티티 디자인도 진행했습니다.
타입디자이너와는 처음으로 인터뷰하는데, 궁금한 게 많아요. 희준님이 서체와 서체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대학교 전공이 한글타이포그래피였어요. 나중에 그래픽/편집디자인을 할 때도 한글 서체의 조형을 이해하고 다룰 줄 알면 유리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바람.체»를 디자인한 이용제 디자이너가 교수님이었는데, 한글 서체의 조형적 변화를 역사적인 관점으로 교육해주셨어요. 그 뒤 졸업전시에서 제가 디자인한 서체로 전시하며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회사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몇 년간 작업하며 완성하게 됐는데, 그것이 제가 처음 출시한 «청월»이라는 폰트입니다. 한번 완성을 해보니까 잘 모르던 시절보다 아쉬운 부분들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그런 점들을 보완하려는 마음으로 다양한 디자인을 모색하다 보니, 새로운 글자들을 많이 기획하며 작업을 이어 나가게 된 것 같아요.
한국에서 서체디자인 / 레터링의 많이 사용되는 분야나 글꼴 디자이너들이 활동하는 분야가 있다면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레터링]은 사실상 거의 모든 분야에 수요를 갖고 있습니다. 임팩트를 주고 싶은 글자가 있다면 어디든 필요한 거죠. 과거보다 레터링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져서 전문 디자이너에게 의뢰하는 분위기가 많아지고 있어요. [서체디자인]은 완성까지 들어가는 작업의 볼륨이 꽤 높은 편이라, 다른 분야에서 쉽게 의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홍보를 목적으로 폰트 제작을 요청하고 그것을 무료 배포하는 형태도 있는데요. 기업 이름을 알리고 홈페이지 트래픽을 높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폰트를 활용하는 거죠. 어쩌면 한국에서 가장 많은 유형일지도 모릅니다.
최근 작업하신 ‘기하체’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인터뷰를 읽었습니다. 폰트에서 정갈함과 시원함이 느껴지고 동시에 운율이 느껴지는 게 정말 장기하씨의 노래 같더라고요! 인터뷰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폰트의 주인공인 장기하씨와 질문을 주고 받으면서 글자를 의인화 하셨다고요.
기하는 사실 장기하라는 인간 개인을 의인화한 것이 아니라, 장기하라는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글자에 담아낸 것이 정확한 표현인 것 같네요. 작업을 시작한 시점에는 데모곡이 나오기 전이어서 우선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작업했어요. 곡들의 개별적인 느낌보다 뮤지션 장기하를 관통하는 정체성이 무엇이고, 그것을 글자에 담아내는 것이 가능할까 고민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장기하 특유의 운율을 글자에 담아내는 것이 적합할지가 가장 고민이었는데요. 이를테면 글자의 너비를 음절마다 달리 설정해서 리듬감을 줄 수도 있고, 획의 대비를 크게 줘서 획 대비에서 운율이 느껴지게 할 수도 있고, 획을 다양하게 분절해서 운율이 느껴지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이후 공중부양 앨범의 데모곡 다섯 곡을 듣게 되었는데요, 담백하게 정제된 뮤지션 장기하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리고 몇 차례 미팅 자리를 갖고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기하님은 자연스러움을 중요시하는 창작자라고 느꼈습니다. 이런 가치관을 글자에 대입하면, 뼈대에만 집중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운율을 만들어 내기 위해 특별한 형태나 장식을 넣지 않고, 글자의 뼈대 자체로만 특유의 억양이 느껴지도록요. 이런 자연스러움에 대한 가치관은 제가 서체를 제작할 때도 추구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창작자로서 가치관이 일치했던 것 같습니다.
폰트가 묘하게 장기하씨의 뚝 끊기기도 하고 흥얼 흥얼 흘러가는 듯한 장기하씨 노래의 맞추기 어려운 운율감을 표현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장기하씨의 과하지 않으면서도 특이한 옷 스타일이라든가, 생김새와도 어울리는 것 같고요.
인간 장기하의 존재를 아예 반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저는 기하님 얼굴 형태가 너무 길지도 넓지도 않은 정방형의 비율을 갖고 있다고 느꼈는데, 글자의 비율에도 이런 부분을 반영해서 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기하님 얼굴이 길쭉한 형태였다면 너비가 좁은 장체의 뼈대를 가진 글자가 나왔을 거예요 (ㅋㅋ). 이 이야기를 나중에 완성하고 기하님께 해줬는데 웃으시더라고요.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박재범의 드라이브, 최정훈의 밤의공원 글자가 의인화한 면은 더 강한 것 같아요.
박재범은 스웨그가 강한 랩퍼로서의 박재범도 있지만, 날렵하고 쿨한 댄서의 이미지도 갖고 있어요. 후자의 이미지를 반영해서 글자를 제작한 것인데, 시원하게 드라이브하는 이미지가 느껴진다고 제작진분들도 만족했습니다.
최정훈의 밤의공원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최정훈이라는 사람의 외형을 반영한 케이스예요. 제가 생각하는 최정훈은 전체적으로 기다란 이미지예요. 팔다리가 길쭉하고, 곱슬머리와 어우러진 얼굴은 약간 역삼각형의 균형을 갖고 있다고 느꼈죠. 이런 여러 요소가 직관적으로 느껴질 수 있게 노골적으로 디자인한 글자입니다.
제작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폰트가 있다면 그 이유와 함께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최근에 4종 패밀리로 출시한 «신세계»가 가장 어려웠어요. 2018년부터 제작했으니 5년 정도 걸렸습니다.
신세계에 대해서는 한글 고유 세계관을 훼손하지 않은 채, 한자 명조체가 갖고 있는 형태적 특징을 자연스럽게 반영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요. 어떤 요소들이 한글서체를 한글서체답게 느껴지게 만드는 것일까, 한자 명조체가 갖고 있는 요소를 어떻게 반영해야 자연스럽게 보여질까 고민했습니다. 만족스러운 형태를 찾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어요.
레터링하는 분들의 작업 스케치는 종종 봤는데, 폰트가 제작되는 과정도 궁금해요. 폰트 제작 프로세스에 대해 간략하게 알려주실 수 있나요?
항상 모음의 [ㅣ], [ㅡ] 형태부터 디자인합니다. 거기서 나온 요소를 토대로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타카타파하]의 형태를 고민해요. 고민이 끝나면 최소 2,350자 정도의 글자를 작업해야 합니다. [가각간갇갈갉갊 .. 핥함합핫항] 등과 같은 글자들이요. 양이 많기 때문에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에요.
긴 시간을 들여 한글 디자인을 끝내도 알파벳, 숫자, 문장부호, 특수기호 형태를 작업해야 합니다. 디자인 작업이 끝나면, 이것이 하나의 폰트 파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파일을 제작하는 제너레이트 작업이 필요해요. 다양한 소프트웨어에서 잘 호환할 수 있도록 제너레이트 하려면 결국 프로그래머의 도움을 받아야하고요. 국내에는 [라인갭]이나 [폰트퍼블리셔] 같은 업체에 의뢰하여 협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님 본인과 가장 닮은, 가장 ‘채희준’다운, 채희준과 닮은 폰트가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저의 존재를 반영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한 서체는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제가 제작한 서체들은 다 저 같다는 말을 종종 들었어요. 학생 때 교수님이 저를 가르치며 평했던 말이 있어요. “예민한데 무던하다. 포기할 줄도 아는데, 우직한 면도 있다.” 그리고 그런 면들이 제 서체에 반영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부드러운데 날카로운 것처럼 양면성이 있는 거죠. 실제 저는 작업할때 형태적으로 하나의 속성이 너무 과하게 치중되는 것을 피하려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희준님의 폰트에는 그 생김새와 어울리는 이름들이 지어져있던데, 네이밍은 어떻게 아이디어를 얻어서 진행하시나요?
작명에 대한 아이디어는 별다른 의도 없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경우가 많아요. 대부분 작업하며 느낀 감정을 토대로 이름을 짓습니다. 그래서 작업이 마무리될 때쯤에 비로소 이름이 붙여지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고요’는 글자가 위치한 공간의 배분이 넉넉하고 여유로워 ‘고요’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붙여줬어요. 작업하며 보낸 시간의 감정과 상황들을 토대로 이름을 지은 것도 있는데요. ‘청월’을 만들 때는 회사에 다니며 밤에 작업을 했고, ‘청조’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오로지 글자 작업만 했어요. 푸른달, 푸른 아침이라는 뜻을 담아서 지은 거죠. 글자의 형태보다는 작업하며 보낸 시간의 감정을 떠올리며 지은 이름입니다.
반면 처음부터 이름을 지은 글자도 있습니다. 초설은 ‘첫눈’의 느낌을 담은 글자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며 형태를 디자인했어요.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온도에서 펑펑 내리는 눈이 아닌, 적당히 차가운 온도에 ‘소복소복’ 보다 ‘사박사박’ 소리에 가까운 느낌을 구현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첫눈의 이미지에는 ‘사랑’이라는 감정도 들어있는 이미지였어요. 출시 이후 방송국에서 방송 자막으로 사용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초설 제작 의도를 생각하면 프로그램 하트시그널과 잘 맞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정말 하트시그널 시즌3의 메인 자막으로 사용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앞으로도 희준님의 폰트들 자주 만나고 싶네요! 현재 희준님이 집중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개인 작업 외에는, KBS2 프로그램 [더 시즌즈]의 레터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더 시즌즈]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후속 프로그램으로, MC의 이미지에 맞는 레터링을 제작하고 있어요. 1년간 4명의 MC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인데 지금까지 박재범과 최정훈, 2명의 이미지에 맞는 레터링을 제작한 상태예요. KBS에서 관습적인 방식에서 벗어난 특별한 프로그램이라고 제안해 주었는데, 저도 각 MC에 맞는 레터링을 제작하는 게 흥미롭게 느껴져서 애정을 갖고 작업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인터뷰를 읽고 계실 노폴러들에게 마지막 인사 부탁드립니다.
작년에 뚝섬역 서울숲 근처에서 팝업 전시를 열었는데요. 폰트는 그냥 컴퓨터가 알아서 자동으로 만들어 주는 개념인 줄 알았다는 분이 정말 많았어요.
폰트도 누군가의 고민과 노력을 통해 제작된 창작물이라는 인식이 많이 확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앞으로 서체 디자인 분야의 가능성을 넓힐 수 있는 다양한 시도를 할 생각이니 관심을 두고 지켜봐 주세요! 감사합니다.
타입디자이너 채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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