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소도시 인턴십 이야기
웹드라마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나이든 서양 남자가 가질 법한 동양인 여자에 대한 편견과 판타지를 잔뜩 버무려 놓은 인물이었다. 70대 노인의 어린 여자 친구로, 총명하고 아름다우며 조용하고 너그럽고 어딘가 신비로우며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정말 요술을 부려버리는 막장 중의 막장.
남성들이 만들어 내는 '여성'의 이미지가 얼마나 얄팍하고 이분법 적인지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놈의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타령은 정말 지겹지도 않은지. 그 잘났다는 하루키만 봐도. 애초에 막장코미디가 컨셉이었기 때문에 큰 신경은 쓰지 않았다.신경썼다고 한들 뭐가 달라졌겠냐만은.
리딩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스테파노는 나에게 짧은 모노로그를 하나 직접 써달라고 부탁했다. 극 중 관찰자 겸 이방인 역할을 하는 그녀는 나와 비슷한 상황의 인물이었고 나는 어렵지 않게 독백을 쓸 수 있었다. 그녀가 어째서, 또 얼마나 극 중 인물들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글이었다. 당연히 실제 배우들과 이탈리안들에 대한 내 생각과 겹쳐졌다.
스테파노는 내 글을 팀원들에게 이탈리아어로 번역해서 들려줬다. 스테파노가 글을 읽는 동안, 다들 미간이 올라가고, 심장에 손을 얹고 급기야 배우인 에바는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이탈리아에서는 원래 과장된 반응을 하는게 예의인가, 이정도면 고도의 인종차별 아닌가 생각하며 이 낯간지러운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바랐지만 지나고 보니 참 따듯한 순간이었다.
이탈리아가 나에게 주는 경험들은 대개 이런 식이다. 치킨으로 치면 반반에 치킨무랄까. 굉장히 인종차별적이면서 또 한편으론 따듯하고, 개방적인 듯 하면서도 보수적이고, 꽉 막힌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너그럽고. 외국인이 갖는 한국인의 이미지는 어떨까 궁금해진다.
얼마 전 <한국에 삽니다> 라는 책을 읽었다. 이탈리안이 이야기하는 이탈리아의 문화와 또 한국과의 이런저런 문화차이를 다룬 글이다. 정. 이탈리아에는 우리나라의 '정'과 비슷한 표현이 있다고 한다. 나는 이 사람들에 대해 뭘 알고 있을까. 이 사람들은 또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사람들은 나를 다양하게 부른다. 내 본명 말고 역할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고, 사랑, 보물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왜 나에게 이렇게 친절할까? 왜 항상 나에게 예쁘다고 말해줄까?
설탕을 듬뿍넣은 커피를 홀짝이며 사람들의 눈을 훔쳐본다. 집에 돌아와서는 화장실 거울 속 내 눈을 빤히 바라본다. 사람들이 나를 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예쁜 사람. 나는 좋은 사람.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타인을 볼 줄 아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