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소도시 인턴십 이야기
얼마 전 남자친구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시간을 갖자고.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희망 고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있지만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자고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오겠지. 6년의 연애.
이 곳에서 받아들인 것은 내가 온전히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한국에서는 외롭고 힘들 때마다 도망쳤다. 외로우면 남자친구에게 기대고 힘들면 포기하고 도망쳤다. 하지만 이 곳에선 아니다. 외롭다고 한들 할 수 있는 건 없다. 인턴십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순간 수백만원의 지원금을 도로 뱉어야 한다. 나는 그럴 돈이 없다. 힘들어도 이 곳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어느 순간 깨달았다. 아, 남자친구 없이 살 수 있구나. 어떻게든 살아지는구나.
선반을 열어보니 한국에서 가져온 틈새라면이 한 개 밖에 남질 않았다. 한인마트는 로마에나 가야 있다.
나름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한다. 타고난 조선인 입맛에 김치나 라면 없이 대부분의 끼니를 해결하고 있으니. 한국에서 캔 김치라는 것을 몇 개 가져왔는데 굉장히 편리하다. 개당 한 끼 분량으로 오래되어 쉴 일도, 냉장고에 냄새가 밸 일도 없다.
도착하기 전부터 김치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연극제가 시작되면 다른 지역에서 온 이탈리안 인턴들이 이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될 수 도 있기 때문에 냉장고에 김치 냄새가 배면 곤란했다. 김치 냄새의 침투력은 막강하니까.
막상 이탈리아에 오니 김치에 대한 갈망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 한 달에 두 번 먹었나? 라면도. 매운 국물이 땡길 때 한 번 씩 먹기는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꼴이다. 오히려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밥에 대한 갈망이다.
쌀밥.
쌀밥은 위대하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하아얀 냄비 밥에 프로슈토 한 점 올리면, 한 솥도 먹을 수 있다. 마트에 가면 식재료와 조미료를 유심히 살핀다. 어떻게든 한국 음식을 만들려고. 얼마 전엔 닭죽을 만들었다. 이름 모를 생선으로 페페론치노를 잔뜩 넣은 얼큰한 토마토 매운탕도 만들었다. 어디선가, 요리가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읽은 기억이 있다.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마치면 정원으로 나가 로즈마리를 한 줌 쥐어 뱃 속 깊은 곳 까지 향을 들이 마신다. 눈 앞에 펼쳐진 초록색 풍경을 바라본다. 뒤를 돌아 현관문 안 쪽의 부엌을 바라본다. 내 집. 내 자리. 가난하면 버틸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