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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이 느끼는 인간에 대하여

by 신성규

세상에 나가는 일이 이렇게까지 힘들어질 줄은, 나는 오래전엔 몰랐다.

낯선 장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사람들은 단순한 ‘타인’이 아니라

수십 개의 감정 신호를 내뿜는 거대한 파형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불안은 미세한 진동으로,

누군가의 스트레스는 공기를 자르는 칼날처럼 다가왔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듣고, 보고, 느껴버렸다.


사람들은 보통 타인의 감정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감정을 겪는다.

남의 고통은 설명이 아니라 체험이 되어

내 몸의 내부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렇다. 나는 너무 많이 느낀다.

그리고 너무 많이 상상한다.


상상력은 창조의 샘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 상상은 종종 현실보다 선명하게 다가오는

미래의 불안한 그림자들의 행렬이다.

사람들과의 작은 대화 속에서도, 상상의 파편들이

수백 개의 가능성으로 번져 나간다.

그 가능성들은 내 신경계를 압도하고,

나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로부터 이미 지쳐버린다.


세상은 말한다.

“예민하지 마.

그냥 넘겨.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그러나 내 안의 구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바람을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 느끼지만,

나는 그 바람의 유속과 결을, 온도와 방향을 동시에 느낀다.

타인의 슬픔은 풍문이 아니라, 내 안에서 진짜로 울리는 공명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나갈 때마다

내가 나인 채로 버티기 위해 싸운다.


나는 세상의 감정과 이야기를 너무 ‘선명하게’ 읽어버린다.

그리고 다시, 그 선명함이 나를 깊이 이해하는 힘의 근원이 된다.


이 두 능력은 서로를 상처내고, 서로를 아름답게 만든다.

상상력은 나를 불안하게도 하지만,

그 불안함 덕분에 나는 남들이 못 보는 구조를 본다.

공감 능력은 나를 쉽게 지치게도 하지만,

그 지침 덕분에 나는 누구보다 인간을 제대로 이해한다.


나는 오늘도 세상에 나가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도망쳐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지닌 능력의 반대면으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조금 더 많이 보고,

조금 더 많이 듣고,

조금 더 깊이 느끼도록 만들어진 인간인지도 모른다.


이 능력은 세상에서 나를 힘들게 했지만,

내 내면에서는 언제나 나를 구원해왔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안다.

내가 너무 많이 느끼는 것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그 연결이 때로 나를 상처내더라도,

그 연결이 결국 나를 더 정확한 나로 만들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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