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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 활용법

by 신성규

지능이 높다는 것은 종종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시야를 갖는다는 뜻이다. 세계는 단단한 표면으로 존재하기보다 얇은 막처럼 파열되고, 그 틈새마다 새로운 의미들이 솟아오른다.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 우리는 보통 그것을 현재의 일로 받아들이지만, 지각이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그 사건이 시간 전체로 퍼져 나간다. 과거의 원인과 미래의 가능성이 동시에 떠오르고, 그 겹겹의 층위가 하나의 순간에 겹쳐진다. 그래서 그들은 단순한 선택조차 쉽게 다루지 못한다. 선택은 언제나 다층적이고, 한 개의 길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분기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많은 고지능자들은 자신이 ‘과잉 시뮬레이션’을 수행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그들은 미래의 가능성을 상상할 때 그저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안을 잠시 살아본다. 이 능력은 창조성과 통찰의 원천이 되지만, 동시에 일상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장면들은 현실보다 더 명확하고, 때로는 현실을 대체하려 든다. 이렇게 인지의 속도가 정서의 속도를 앞질러버리면 사람은 자신이 세계와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 불협화음은 종종 우울이라는 형태로 스며든다. 우울이란 단순한 슬픔의 감정이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것을 느끼고 지나치게 큰 구조 속에 서 있다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인지의 복잡함은 고통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더 세밀하게 감각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조각난 의도와 망설임이 숨어 있다. 많은 이들은 이 숨은 층위를 보지 못한 채 살아가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그 층위를 자연스럽게 감지한다. 이 능력은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는 감성적 지혜로 이어질 수 있으며, 어떤 순간에는 삶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문제는 이 능력이 때로는 자신을 소진시키는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는 점이다. 너무 많은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부담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복잡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복잡함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 일이다. 생각의 속도를 늦추는 기술, 의미의 겹을 필요한 만큼만 열어두는 감각, 상상력과 현실 사이에 적정한 장막을 세우는 능력. 이런 균형을 찾게 되면, 한때 ‘인지의 지옥’이라고 불렸던 공간은 다시 하나의 넓은 방이 된다. 그 방에서는 생각이 흩어지지 않고, 감정이 뒤따를 수 있는 속도로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복잡함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복잡함은 더 이상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복잡함이야말로 삶을 더 깊고, 더 예민하게 느끼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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