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개신교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 이유는 단순한 취향이나 문화의 차원이 아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든 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내면의 공포를 자극하는 방식이었다. 개신교는 ‘지옥’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로 나를 꾀려 했고, 그 방식은 마치 공포를 자본으로 삼는 무기 같았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메시지는, 신념이라기보다 협박에 가까웠다.
물론 그 신념을 지닌 사람들 모두가 그런 방식으로 접근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주변의 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도덕적 권위에 기대며 타인을 평가하거나, 전도라는 이름으로 자기 확신을 주입하는 데에 익숙했다. 이들이 윤리적으로 특별히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 허위성과 이중성은 나를 멀어지게 했다.
그렇다고 천주교가 이상적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성당에 자발적으로 나간 적이 있지만, 그곳의 문화 또한 낯선 이를 향한 강한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당신은 아직 이 공동체에 속할 자격이 없다’는 암묵적 신호처럼, 처음 한두 달은 거의 투명인간처럼 취급받았다. 개신교가 너무 적극적이라면, 천주교는 지나치게 수동적이었다. 둘 다 ‘전도’라는 개념에 있어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전도란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것도, 무작정 다가가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전도는 삶의 동반 속에서, 고통의 공감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누군가 어려움을 겪을 때, 조용히 곁을 지키고, 도움을 주며 삶의 지평을 함께 넓히는 것. 진정한 신앙은 언어가 아니라 태도와 시간 속에서 증명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NGO나 종교기관이 길에서 하는 모금 활동에도 거리감을 느낀다. 의도가 아무리 선해도, 그것이 도움을 가장한 확산 행위로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봉사란 누군가를 진심으로 돕고 싶을 때,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지, 모금함과 스크립트로 시작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결국 나를 괴롭혔던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포장한 방식이었다. 두려움을 자극하거나, 공동체의 벽을 높이거나, 타인을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그 태도들. 내가 신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그 신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신을 말하는 방식이 인간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난 내가 납득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