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의 도구들

by 소은성

하고 싶은 일이 수두룩한데 그 일들이 훼까닥 하기 싫어지곤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다. 이를테면 고장이 난 신호등과 같다. 빨강, 초록, 파랑의 동그라미가 미친듯이 깜빡이는 것이다. 좋았다가 싫었다가 좋았다가 싫었다가, 어쩌란 말이냐 트위스트 추면서. 혹시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보다 다양한 친구를 사귀기 위해 노력해 볼 필요가 있다. 혹은? 그들이 모종의 이유로 당신에게 정체를 숨기고 있을 수도 있다. 전자라면 당신은 오늘은 운이 좋다. 나는 편지를 보내는 당신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훼까닥 인간’이다.

들끓는 욕망과 뒤집어지는 변덕. 호수가 아니라 파도. 군불이 아니라 화재. 두 가지를 한 몸에 가진 사람의 장점이란 흥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흥이 나면 하고, 흥이 떨어지면 안 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씁쓸한 사실도 받아들였다. 장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는 흥을 되도록 오래 이어갈 여러 도구들이 필요했다. 이것들은 정말이지 시시하고 사소하다. 삶을 굴러가게 만드는 대개의 것들이 그러하듯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흥의 도구를 소개해 주세요)

첫번째, 유치뽕짝난리부르스 문구류

“어디 가니?”
“다이소.”
한국 방문 50일째. 매일 반복하는 가족 대화다. 병원과 미용실 방문을 미룬 채 다이소에 간다. 내 방을 채우는 다이소 물건들은 직장인의 일주일을 책임지는 로또처럼 애틋하다. 실용적이고 알록달록한 물건들은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반복’인 훼까닥 인간이 매일의 루틴을 지키도록 돕는 기적을 발휘한다.

영양제 먹기를 즐기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내게는 ‘쌈마이 푸’ 빨대컵이 있다. 둥그렇게 솟은 빨대컵 뚜껑 안에는 푸가 구슬 아이스크림 같은 색색깔의 플라스틱 알갱이 위에 앉아 있다. 크리스마스 스노우볼을 연상케하는 화려함이다. 양쪽 눈 크기가 다르지만 자신이 ‘곰돌이 푸’임을 주장하는 그와 눈을 마주치면 알약 삼키기가 재밌는 놀이 같다. 쌈마이 푸의 광기와 천연덕스러움이 썩 마음에 든다.

국민학교(!) 시절 바닥 왁스칠이 너무 싫어서 “울지 말자. 꼿꼿하자. 우아하자. 아버지는 언제 나를 데리러 오실까?” <소공녀 세라> 망상 놀이를 하던 습관이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지만, 뭐 어때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요, 영양제 4종 잘 챙겨먹어 건강하면 좋은 거죠. “조카 주려고 산 거야?” 라고 묻는 가족, 친구 여러분.

문득 디즈니는 왜 다이소를 고발하지 않을까, 다이소 회장이 디즈니 회장의 배다른 형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일산 다이소에는 미키 마우스 제품이 많고 홍대 다이소에는 엘사 제품이 많다. 전국 다이소만 돌아도 한국 기행이 끝장난다. 질릴 틈이 없다. 매주 업데이트도 빠르다. 엊그제 ‘세서미 스트리트’의 한국인 캐릭터 ‘지영’이 화제가 되었으니, 조만간 전국 다이소에 세서미 스트리트 (물론 짝퉁) 파우치와 노트가 깔릴 것이라 예측해보는 중견 다이소러입니다.

아무튼, 다이소는 루틴을 돕는다. 정말 다양한 포스트잇과 인덱스, 스티커 류를 판다. 상자 가득 모은 포스트잇과 인덱스 덕분에 ‘벽돌책’ 읽기 인증을 할 수 있다. 매일 열쪽씩 읽어야 하는 책이 질려버릴 때는 ‘끄응’ 하며 ‘공주 시리즈’ 인덱스를 꺼내온다. 백설공주, 미녀와 야수의 벨, 인어공주 등 다섯 종의 공주가 한 인덱스에 있고 무려 천원이다. 떼고 붙이는 재미가 책 읽는 재미보다 큰 것도 같지만, 모로 가도 서울이다.


책의 목차를 만들 때도 목차별로 빨노초파회 포스트잇을 벽 가득 붙인다. 그걸 이리저리 움직여 책의 꼴을 만들어간다.


집을 오래 비울 때는 집안 이곳 저곳에 비밀편지를 써서 말풍선 모양 포스트잇으로 붙여둔다. 몸에 좋지만 마시기 싫은 홍삼물에는 ‘머겅 몸에 조앙’ 이라고 쓴 심슨 스티커를 붙여둔다. 웃겨서 먹게 된다. 포인트는 ‘귀여움’이다. 세상이 곧잘 지루한 무채색으로 보이는 ‘훼까닥’ 인간에게는 인공적이지만 성실한 귀여움 투여가 필요하다.


다이소 사랑의 이유는 색깔 때문이기도 하다. 다이소 특유의 ‘유치해'란 뒷말에 끄덕하지 않는 뚝심 강한 원색에서 나는 힘을 받는다.

10년 전 한 타로 선생님은 나에게 반드시 해외로 나가라고 했다. 영어를 하나도 못하니 동남아시아 정도로 쇼부볼 수 없냐고 했더니 도리질을 쳤다. “나라면 안 그럴 거야.” 현관문까지 배웅을 나와준 그녀는 문을 잡고 틈으로 다시 한번 외쳤다. “해외 꼭 가요. 자기야. 꼭이야.” ‘탈조’ 열풍이 불면서 “그녀가 앞서나간 메갈이었나?” 싶기도 했으나 아무튼 한국 밖에 살게 되었으니 용하긴 용하다.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빨주노초파남보. 그런 것 입으세요. 베이지! 그레이! 그런 건 보지도 마!” 나는 당황했다. 누가 그렇게 입어요. 한국은 검은 패딩의 나라인데요. 지오다노의 베이지가 지배했던 나라인데요. 강의 경력도 없는 신입기자인 나에게 글쓰기 수업 의뢰가 와서 수락할지 말지 의논하러 간 건데, 그녀는 색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 운을 바라면 빨강 팔찌, 사랑 운을 바라면 파랑 팔찌.” 그녀는 루비나 사파이어를 말하는 거라고 했지만 나는 음, 실팔찌로 대체하면 되겠군, 생각했다. 그녀의 시선은 내 이마를 가린 앞머리로 향했다. “이마도 까고 다니세요. 드러내세요. 누가 뭘 주면 다 받으세요. 누가 뭐 하자면 다 하세요. 그래야 되는 상이에요. 그런 운명이에요.”

어떤 말은 몰랐던 나를 드러낸다. 알고 보니 나는 무채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련된 사람인 척 하기 위해 오랜 기간 무인양품의 팬인 척 한 과거를 나는 속죄한다. 무인양품 스토어에 들어가면 절로 하품이 나온다. 태국 짜뚜짝 시장에서는 혈관에 산삼액을 주입하는 기분이었지.

참! 다이소보다는 질 좋은 자주나 모던하우스 물건을 권유하는 친구에게 두 가지 사실을 고한다. 첫째, 다이소는 내 훼까닥에도 끄떡없다. 동네방네 자랑할 정도로 애정하던 곰돌이 푸우 빨대컵에 싫증이 나면? 다음달에 호머 심슨 빨대컵으로 환승하면 된다. 푸우와 심슨을 합쳐 1만원이 든다. 에코이스트인 파트너가 알면 60분 분량의 환경주의 대화를 해야 할 테지만 다급히 “양해 부탁드립니다.”를 외쳐본다. 프랑스에 사는 내내 모든 음식물 쓰레기를 거름으로 삭혀 텃밭으로 돌려보낸 나의 수고로움와 비닐봉지 사용을 줄이기 위해 장바구니를 여행지까지도 들고간 나의 성실성으로 똔똔하기로 합시다.

시간이 다 되었다. 첫번째! 하고 외쳐놓고 한 가지만 길게 이야기하는 게 흥많은 인간이다.

아무튼 다음 회에는 ‘오픈카톡방 ‘사무실+곰도리 스티커+불 스티커+주먹 스티커’가 주는 흥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귀여운 흥 가득한 한 주 되세요.




소은성 <친구들에게>는 한국을 떠나 프랑스 남부 작은 도시에 사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메일로 보내드리는 에세이 메일링입니다. 새로운 시즌 구독은 작가소개에서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매거진의 이전글안다고 말하지 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