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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 아니고 기린 Aug 02. 2019

연극, 비너스 인 퍼(2019)

내려오소서, 아프로디테

“결국 SM 포르노잖아요, 그거.”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의 한 마디에 작가는 마치 원작자인 듯 화를 낸다. 단순히 포르노라고 할 수 없는, 그러니까 그보다는 좀 더 심오한 무언가가 담긴, 절대 성차별적이거나 여성을 어떤 도구적인 것으로 보는 게 아닌, 순결하다거나 그런 말로 지배하는 게 아닌. 기타 등등 별의별 소리를 다 한다. 수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원작 소설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에 대해 연구한 것들도 있으니 뭐,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배우가 가방에서 꺼낸 원작 소설의 표지는 명백한 포르노다. 외설적인 그림, 자극적인 글씨체. 툭 던진 책을 보고도 횡설수설 몇 마디를 덧붙이던 작가는 결국 말한다. 이렇게 무식할 수가.


이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든다. 무식한 게 누군데 저런 소릴 하는 거지. 어디까지 가나 보자. 그리고 곧이어 통쾌한 복수가 시작된다. 원작을 숭배하며 그럴듯하게 각색한 작가의 결말은 예상한 대로 추락한다. 배우에 의해, 감히 자신이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여성’에 의해.


*


연극 <비너스 인 퍼>는 동명의 원작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각색해 주인공을 찾고 있는 토마스와 오디션을 보기 위해 찾아온 배우 벤다의 이야기를 다룬다. 토마스가 각색한 소설 그대로가 연극의 제목인 것처럼, 작품은 해당 소설이 소비되는 방식과 그를 통해 엿볼 수 있는 남성의 전형적 시각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극 중 토마스의 말대로 자허 마조흐가 소설을 쓸 때는 ‘절대’ 그런 의도로 쓴 게 아닐지 모르겠지만, 과거로 가서 그에게 물어볼 수는 없으니 알 도리가 없고. 현대를 살아가는 남성들이 이 소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한 보편적인 답의 현신을 찾자니 토마스다. 그는 벤다가 예민한 부분을 건드릴 때마다 극구 부인하며 이 원작 소설에 담긴 심오함과 여성의 상징성에 대해 반박한다. 당연히 들으면 들을수록 말도 안 되는 변명일 뿐이다. 벤다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본다. 그의 말에 어느 부분 공감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결국 그의 여성관과 무지함을 완전히 뭉개버린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내용도 결국 토마스 같은 이들의 무지함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마조히즘은 결국 자신을 지배할 대상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자신이 설정한 틀 안에서 그 대상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또 다른 지배를 함으로써 자신만의 세계관을 설정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오히려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는 것으로 등장한다는 말은 완전히 개소리라는 거다. 압도적인 이미지, 그런 것들을 통한 어떤 고결함과 숭고함. 그게 필요해서 가져다 댄 핑계일 뿐이다.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작품이기에, 이미 결말을 아는 이들이라면 토마스의 멍청한 발언들을 그저 비웃으며 참고 들어준다. 결말부에서 시원한 사이다 한 방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에 덧붙여 배우들까지 말 그대로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연기를 잘하니 잔뜩 몰입해 ‘너 이따 보자, 어떻게 되나.’ 그런 생각이 더 든다. 여성을 대상화하고 지배하려는 무지한 남성들을 짓밟는 속 시원한 결말. 하지만 극장을 나서면 어딘가 답답한 마음이 든다.


*


토마스는 운 좋게 아프로디테를 만나 큰 깨달음을 얻었다(확신은 아니다. 여전히 부인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원인이라면 학습 능력 부족?). 하지만 극장 밖을 나선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아직도 수많은 토마스들이 바글바글하다. 당장 며칠 전만 해도 또 한 번 공연계 종사자가 사회 면을 장식했다. 보도된 내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언행들은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분노하게 만드는 것들 뿐이다. 도대체 왜, 여전히 바뀌지 않는 걸까.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왜 그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생각과 행동들을 고치지 못하는 걸까. 이제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까지 이르게 된다.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고. 이런 말들을 주로 누가 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근원이 전혀 다른 방향에 있다고 해도, 이를 단순히 포르노나 성별 간의 예민한 부분이라 보지 않아야 한다고 해도, 문제는 그러한 것들을 소비하고 있는 방식이다. 여전히 우리는 갈 길이 멀고,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정확히 짚어나갈 수 있는 기회가 적다. 그 적은 기회 속에서 반박 없이 기존의 문제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더 적다.


그러니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걸 끔찍하게 알고 있지만 한 번쯤은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극장 문을 열고 나가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아프로디테가 서 있으면 좋겠다고. 미의 여신이 아니라, 깨달음을 주는 존재로. 속된 말로 이 세상을 한 번 휩쓸어야 할 판이니 말이다.


그래도 한 번 더 간절히 원해본다. 내려오소서, 아프로디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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