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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 아니고 기린 Aug 08. 2019

영화, 20th Century Women(2016)

그러니 우리는 더 찬란하게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나는 이 영화의 국내 개봉 제목보다는 원제가 좋다. 왜 굳이 'Women'을 '우리'로 번역했는지 영 모르겠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그대로 번역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쪽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그랬지만, 보고 나서는 더 그랬다. 이 영화는 20세기에 걸쳐 있는 그들의 이야기도 맞지만, 분명 그 시기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니까.


*


“아닌 건 확실히 아니라고 해야지. 왜 그냥 넘어가는데?”


어릴 땐 종종 그렇게 말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큰 문제가 아니라면 약간의 손해는 괜찮지 않나 하는 어린 마음이었다. (지금은 이 말을 싫어하지만) 우리 엄마는 기가 센 편이구나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엄마의 모습이 당차고 멋지게 느껴지고, 또 부러울 때가 많다. 나는 여전히 그런 순간에 맞서는 것보단 피하는 걸 택하는 쪽이니까. 부모와 자식은 영원히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관계라고 하지만, 적어도 이런 부분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거다. 엄마가 맞선 세상 앞에 나 혼자 서게 될수록 더더욱.


도로시아는 아들 제이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요즘의 세상’은 자신이 살았던 세상과 너무 다르고 또 너무 빠르게 변화한다. 제이미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엄마가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작정하고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야.’ 하는 엄마는 더 낯설다. 자식들이란 참 변덕스러워서 이해를 못하면 못하는 대로 서운하고, 이해해보겠다고 가까이 오면 부담스러워하는 법이니까. 도로시아가 밴드 공연을 직접 보러 가는 장면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당신이 믿었던 세상과 다른 또 하나의 세상. 절대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겠구나 싶을 때 드는 낯선 느낌, 이 세상 속에 있는 내 아이를 볼 방법이 없다는 데서 오는 공허함. 간접적으로나마, 이런 시선이겠구나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게 좀 찔려서였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건너 안방에 있는 중년의 여성을 떠올렸다. (불러서 같이 보자고 할 용기 비슷한 건 당연히 없었고.) 나와 내 동생을 이해하기 위해 늘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종종 한계가 오면 밥상에서 열띤 토론을 하고, 때론 놀랄 만큼 개방적이라 말이 잘 통하는 친구 같은 사람. 제이미는 막연하게 느꼈을 감정일지 모르지만, 같은 여자인 나는 좀 더 나아가 생각해봤다. 당신을 이해할수록, 남은 당신의 세상은 그 나름대로 찬란하지만 쓸쓸하겠구나 하고. 하지만 이 또한 어디까지나 내 감상일 것이다. 나름대로 책의 한 구절을 낭독한 제이미에게, ‘책을 읽지 않아도 나는 나에 대해 잘 알아.’ 하고 짧은 감상을 남기던 도로시아처럼.


*


부모와 자식 관계, 엄마라는 사람만이 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다른 세대와 가치관을 가진 여성으로서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도로시아, 애비와 줄리 세 사람은 각자 너무 다른 유형의 사람으로 등장한다. 당연히 이 관계에서 서로 간의 완벽한 이해는 바랄 수 없지만, 같은 여성으로서 끈끈해질 수밖에 없는 연대감이 존재한다. 이에 더해 단순히 연민 같은 단어로는 말하기 어려운, 무언가 복잡 미묘한 서로를 향한 감정 또한 생겨나게 된다. 애비와 줄리는 제이미 사춘기 극복 프로젝트의 멘토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도로시아의 멘토이자 멘티가 되는 셈이다.


또한 영화는 이들을 통해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현대의 다양한 시선을 그린다. 감독은 이 과정에서 세 사람을 포함해 제이미와 윌리엄을 통해서도 남성이 이해하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당연히 정답은 없다. 어떤 방식이 정답인지, 어떤 시선으로 스크린 밖의 몇십 년이 지난 지금 이 세상을 바라볼지는 각자가 선택할 문제다.


*


“Wondering if you’re happy is a great short-cut to just being depressed.”


어쩌면 이 영화를 보며 지금 나의 엄마에 대해, 조금 먼 미래에 ‘요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할 나에 대해 가늠해보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일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글을 마무리하는 아직까지도 이 영화 VOD를 엄마에게 보여줄지 말지 고민하는 나로서는 더더욱.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행복한지 생각해보는 건 세상에서 제일 우울하고 멍청하지만.

서투르면 서투른 대로, 담담하면 담담한 대로. 어떤 시절을 살았던지 간에 그 나름대로 찬란하긴 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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