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기린 아니고 기린
Jul 24. 2019
영화, 우리들(2016)
이런저런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을 때
‘이래서 좋고, 저래서 싫고.'
그런 말들을 하게 되는 순간 어른의 세상으로 가는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좋으면 좋은 대로 눈에 담았던 세상의 문이 닫히면. 어른이 되는 거라고.
*
내 안의 문은 꽤 일찍 닫혔다. 물론 내가 원해서 어른의 세상을 향해 힘차게 발을 디딘 건 아니었다. 그래야만 하는 상황들이 있었고, 대한민국의 장녀 딸로 태어났다는 뻔한 클리셰까지. 그저 서로가 좋았던 선과 지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들 또한 두 아이들을 어른의 세상으로 가게 만든다. 모든 것이 내 문제라는 책임감, 버겁지만 어른스러워야 하는 상황,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해야 하는 어른들. 떠오르는 기억들을 꾹꾹 눌러 담으며 봐야 하는 이야기였다. 닫혀 있던 문을 자꾸만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우리들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버렸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 무너져버렸던 건 딱 한 마디의 대사.
“그럼 언제 놀아?”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그렇게 문을 닫아버리기 전에 나도 그렇게 이야기했으려나. 수많은 이유들을 생각하고,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라면 우리는 언제 놀고 웃을 수 있는 거야? 하고. 러닝타임 동안 지나간 대부분의 장면들이 그랬지만, 특히나 서글퍼졌다.
*
열린 문 틈 사이로 기억나는 사소하지만 또렷한 것들 중 하나는 ‘피구’였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때 여자 아이들에게 피구는 단순한 운동이나 놀이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선택하고, 누군가는 선택을 기다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순간만큼은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다행인지 운동신경이 좋았던 나는 늘 누군가를 선택하는 쪽에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순간이 즐겁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누군가가 선의 언저리에 있다가 금을 밟고 나가면, 나는 늘 묘하게 불편했다. 마치 이 작은 놀이가 하나의 세상이라도 된 것처럼 크게 느껴졌고, 그 세상에서 내가 저 아이를 밀어낸 것만 같아서.
선과 지아가 라인 밖에 서 있는 장면에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묘한 불편함은 어쩌면 그 작은 두 개의 네모 칸이 어른의 세상과 너무 닮아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 밖으로 밀려난 사람, 끝까지 아등바등 버티는 사람, 여유롭게 그 안에 있는 사람. 우리는 늘 그중 하나가 되고, 언제든 다른 쪽으로 밀려나거나 올라가는 그런 어른으로 버티고 있으니까.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이 피구라는 건, 그래서 좋았다.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에도 커다란 운동장을 떠올리며 두 개의 작은 네모 칸을 그렸다.
운 좋게도 선택하는 아이 었던 나는, 어른이 된 지금 그 안의 어디쯤에서 어떤 역할로 뛰고 있는 걸까.
*
“우리 친구 하자.”
한 마디면 충분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우리들에게도. 어쩌면 아이의 세상에서도, 어른의 세상에서도 관계와 역할이라는 건 그렇게 단순한 걸지도 모른다. 자꾸 잊게 되지만, 그렇게 생겨난 ‘우리’ 에게 이런저런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 그래도 충분히 괜찮다. 잊어버렸지만, 그랬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다시 닫혀버린 문을 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적어도 한 번쯤은 긴 말 없이 그냥.
그렇게 ‘그냥’ 하고 넘기고 싶은 순간들이 찾아오면, 다시 이 영화를 꺼내보겠지.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