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가상과 현실 그 어디쯤
60대의 유명 연출가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고 무대 위에 서서 말한다.
“이 작은 기계 안에는 내 모든 것이 들어있고, 그럴수록 내가 기억하는 것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락처조차 외우지 못한다며, 사실상 외워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비단 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연락처, 크고 작은 일정들까지. 머릿속으로 기억해야 할 것들은 대개 스마트폰 안에 차곡차곡 저장된다. 정작 그 작은 기계가 손 안에서 사라져 버리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로 인해 난감한 상황이 생긴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데도 말이다. 공감되는 이야기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그가 또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시간이 지났어도 아주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삶의 중요한 시절이었다거나 특별한 어떤 순간도 아니다. 그럼에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자신의 번호조차 외우지 못하는 60대의 연출가의 머릿속에 아주 생생히 남아 있는 기억의 조각들. 연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질문을 안은 채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기억’이라는 건,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과연 정말 기억한다는 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 걸까.
*
내 머릿속에도 외우고 있어야 할 것들 대신 그 자리들을 차지한 채 이유 없이 박혀 있는, 어쩌면 쓸모없을지도 모르는 기억들이 있다. 어릴 적에 살던 아파트 단지 앞 유치원 미끄럼틀의 색깔, 아주 평범한 어떤 날 교복 안에 받쳐 입었던 티셔츠의 그림, 지금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친구가 나에게 했던 시시콜콜한 농담. 딱히 중요하다거나 강렬한 인상으로 남을 만한 것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순간에 멈춰 있는 것처럼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할 노릇이다. 대체 왜 이런 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지?
르빠주는 이런 모든 의문 앞에서 한 번 더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정말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요?’
어쩌면 기억이라는 건, 그냥 지금의 내가 만들어 낸 시시콜콜한 가상의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저 가상의 어떤 조각들을 머릿속에 채우고 ‘기억’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그때의 현실이 되고, ‘추억’이라는 이름을 붙여 더 특별한 어떤 것으로 안고 있는 걸지도. 르빠주가 연극 내내 하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 또한 그렇다. 이 연극 속 모든 에피소드가 정말 그가 보고 겪었던 이야기들인지, 연극을 위해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설령 전자가 맞다고 해도, 무대 위에 서 있는 르빠주는 이 문제의 정답을 말할 수 없다. 한 치의 왜곡도 없는 현실인지에 대해 물었을 때 정답을 아는 건, 이미 지나가버린 어린 시절의 르빠주 한 사람뿐이니 말이다.
무언가를 기억 ‘하는 것’ 만큼, 기억 ‘되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다. 르빠주는 이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세계적인 연출가가 세상을 떠날 때를 대비해 미리 녹음해 저장해 둔 음성 파일. 르빠주는 친구를 통해 얻어 낸 파일로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를 미리 듣는다. 이어폰 안에서 흘러나오는 문장들을 듣는 그의 표정은 절대 밝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만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기억이라는 건, 현실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모호한 어떤 것이라고. 결국 기억의 정의는 현실과 환상 그 어디쯤에 놓이게 된다.
*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좋았던 기억들이 나쁜 기억이 되어 버릴 때가 있다.
그렇게 기억은 그렇게 쉽게 뒤바뀌고, 왜곡되고, 또 어느새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더욱이, 기억이라는 건 정말 한 편의 연극과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르빠주가 무대 위에서 하고 있었던, 우리가 객석에 앉아 보고 있던 한 편의 이야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