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기린 아니고 기린
Jul 25. 2019
연극, 킬 미 나우(2019)
세상의 모든 트와일라들에게
“나한텐 심각한 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어. 나한테 나는 없어.”
연극 <킬 미 나우>는 지체 장애를 가진 아들 조이와 아버지 제이크의 이야기를 다룬다.
작은 변화도 두 사람에게는 더없이 큰 산이다. 제이크는 조이에게 일어나는 다른 아이들과 같은 크고 작은 성장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당황스럽고 두렵다. 조이가 점점 자라는 만큼, 자신은 반대로 점점 약해지고 늙어가고 있으니까. 이런 문제들을 온전히 제이크에게 기대야 하는 조이도 마찬가지다. 부끄럽지만 이를 피해기 위해서는 수많은 문제들과 직면해야 한다. 더구나 조이의 변화보다, 제이크의 변화가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예상했던 방향 그대로 흘러간다. 물가에 둔 오리가 물살을 타고 떠 내려가는 것처럼.
조이와 제이크는 물살을 타고 불안정하게, 나름의 속도로 흘러간다. 하지만 두 사람만이 이 여정을 향해 발을 내딛고 있는 건 아니다. 이들의 곁에는 언제나 괜찮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제이크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자 조이의 고모인 트와일라가 있다.
*
괜찮지 않지만, 언제나 괜찮아야 하는 사람.
나는 꽤나 일찍 철이 든 편이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들이 그랬고, 평범한 대한민국 가정의 장녀 딸로 태어난 건 달갑지 않은 덤 정도가 되려나. 어리광을 부리거나, 떼를 쓰는 건 나에겐 너무나 먼 이야기였다. 그렇게 살면서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냐고 묻는다면 그땐 아니었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상황이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뿐.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스무 살이 넘고서도 꽤 오랜 시간을 당연히 나에게 주어진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스무 살을 훌쩍 넘은 지금, 가장 후회되는 일을 꼽으라면 ‘늘 괜찮아야 했던 모든 순간’ 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나는 너무 늦게 그 모든 걸 깨닫고 다시 돌아봤다. 애를 쓰고 있었구나, 서러울 만큼 괜찮지 않았구나, 그렇게 깨달았다.
트와일라 또한 자신의 삶을 잃어가는 제이크의 곁을 챙기고, 조이에게도 누구보다 따뜻한 고모로 묵묵히 제 몫을 다 한다. 준비도 없이 두 사람을 집어삼키는 변화 앞에서 언제나 웃으며 위로를 건네는 것도, 중요한 선택 앞에서 설득을 하는 것도, 그들의 결정을 그저 수긍하는 것도 트와일라다. 물론 트와일라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조명이 들어온 뒤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는 그 찰나의 순간으로도 엿볼 수 있다. 설명되지 않았을 뿐, 그녀에게는 아마도 그런 시간들이 수도 없이 많았으리라. 오로지 혼자서, 그마저도 묵묵히 견뎌오고 참아왔을, 괜찮기 위해 뒤돌아서서 추슬러야 했던 시간들 말이다.
괜찮은 사람들의 뒤편에는 언제나 그렇게 버티기 위해 존재하는 절대적인 시간들이 있다. 드러나지 않기에 더 아프고, 더 길게만 느껴지는 그런 시간들. 이 유형의 사람들은 대개 그 무게를 깨닫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자신조차도, 스스로 감당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그저 괜찮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사실이 서럽게 느껴지는 만큼, 당연히 화가 났다. 제이크가 조이의 아빠라는 사실이 당연한 것처럼, 트와일라에게 제이크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자 소중한 오빠였을 테니까. 그래서였겠지. 마지막 순간에 딱 한 번, 싫다고 제이크를 붙잡던 모습이 내내 머릿속을 아프게 울렸다. 그렇게 뒤돌아서서 홀로 견뎠을 그 시간이 너무나 선명히 보여서.
이 길고 긴 여정은 분명히 제이크와 조이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나는 그 물살을 타고 트와일라의 뒷모습을 내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그 등을 다독여주고 싶어서. 괜찮지 않다면, 언제든 그렇게 말해도 좋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
기나 긴 여정의 끝엔 세상의 모든 제이크와 조이가 자신들의 의지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미래가 있길 바란다. 하지만 나는 사실 조금 더 간절하게, 이 세상의 트와일라들이 행복하기를 기도해본다. ‘나 괜찮지 않아.’ 하고 말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