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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소호 Jul 19. 2019

노독

외국인이 되려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늘 불현듯이 '노독'이란 글자의 '독'이 혹시, 진짜 그 '독'일까?... 설마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사전을 찾아보니, 노독의 뜻은 '먼 길에 지치고 시달려서 생긴 피로나 병'으로 나와있었다. 그렇다면 '노병'이나 '노통' 정도로도 말이 될 텐데, '노독'은 '병'도 아니고 '통'도 아닌 '독'이어야만 한다는데, 근슬쩍 알겠다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먼 이국 땅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은 아무래도, "왜 이곳으로 오셨어요?" 일 것이다. 학교 입시 때 교수 앞에서나, 어학을 할 때 학생들 앞에서나, 집 구하러 다닐 때 동양인 자체를 신기해하는 노인분 앞에서나... 그 질문은, 모범 답안 몇 가지를 겨우 추려 성의 없이 대답해 치워버려야 하는, 처음 듣는 그 순간부터 지겨운 과제였다. 처음 보는 사람을 붙들고 구구절절 내 심정 상태를 이해시킬만한 언어 능력도 없었지만, 내가 독일에 온 이유라는 것들이 놀랍게도 순식간에 설득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현대미술 배우러 독일로 많이들 오잖아요~'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독일어를 한 게 인연이 됐어요..'
'현대미술 뿌리가 있는 곳에 와보고 싶었어요. 여기는 자료의 양만 해도 어마어마하더군요~'
내가 준비된 호의적 표정으로 해치워버렸던 멋쩍은 모범답안들이다. 하지만 사실, 나를 이 곳으로 이끈 것은 합리적인 상태에서 내려진 깨끗하고 후회 없는 '이성'이 아니었다.

막말로, 그저 뛰쳐나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거기다 사회에 팽배해 있던 성공 지침서가 한몫했다는 걸 숨길 수도 없겠다. 간단히 말하자면,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올라가듯, 대학 이후 유학의 길을 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나는 '유학' 자체를 과소평가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아니라면 더욱 분명 해지는 것은, 나는 나 자신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학'의 장점을 헤아려보자면, 견문이 넓어져 풍성해지는 교양과, 선진 사회의 시스템을 직접 경험하는 기회, 새롭고 설레는 환경에 둘러싸인 아찔한 즐거움, 얼마든지 자랑거리가 되는 외국 친구들, 학문에 있어서 '상류'를 누리는 자존심 충족, 귀국 후 보장돼야 할 듯한 나의 성공?... 등등이 있겠지만, 앞에 나열된 것일수록 사실에 가깝고, 뒤로 갈수록 단연 거짓말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래도 좋다고 치자. 위에 나열된 것들이 노력 여하에 따라 다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쳐도, 치명적으로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노독'이었다.


소설가 박완서가 미국 딸네 집에 가있는 동안의 기록 중 한 구절이다.

'... 또 그 절박한 외로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내가 참을 수 없어하는 게 무엇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건 말 못 알아들음이었다. 내 나라에서건 남의 나라에서건 사람 모이는 데 가면 들리는 건 사람들의 말소리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구태여 남의 말을 엿들으려고 노력을 안 해도 내 나라에서 들리는 건 당연히 내 나라 말이고, 어려서부터 들어온 내 나라 말의 리듬엔 공기처럼 의식할 필요 없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정다움이 있었다...'

여독이 쌓이는 경로야 다양할 테지만, 내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이 '못 알아들음'이다. 학교 들어가고 집 구하고 장을 보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언어를 구사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상대방과 눈을 마주 보고 의사소통하는 그런 정직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집단 속에 웅성 거리는 소리를 비굴하게 엿듣는 능력이 없다는 데서 발생한다.


사람은 매초 매시간 판단을 하며 살아간다. 시장바닥에서 들려오는 억척스러운 장사꾼의 말을 엿들으며 하는 판단, 전시회 갔을 때 미술을 사랑한다던 교양이 철철 넘쳐흐르는 여성의 말을 엿들으며 하는 판단, 전화로 수다 떨다 남의 신경을 긁던 친구의 실수를 잡아내어 두고두고 곱씹던 판단. 그런데, 숨 쉬듯 쉼 없이 이어져야 할 이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차단되어 버리는 곳이 외국이었다. 남을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은, 나 또한 판단받을 대상자로서 어떤 모습을 취해야 이로운가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나를 만족스러운 '나'로 떠받쳐주던 온갖 '언어적 수단'(사고방식을 포함해서..)을 박탈당한 상태에 빠져들고 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다 같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남들은 생각지 못한 기막힌 발언을 한 후 돌아오는 의기양양함, 바로 이 타이밍에 치고 들어가는 나만의 유머감각이라던가 재기 발랄함, 오랜 시간 길들여지고 다듬어진 나만의 절제된 억양, 그리고 그로 인해 드러나는 나의 교양, 천박한 직설법을 쓰지 않고도 한껏 돌려 다른 사람의 허를 찌르던 나의 냉소 혹은 비판들...

외국어를 하고 산다는 것은, 이와 같은 자동 반사적인 자기 확인이 더 이상 불가능해 짐을 말한다. 이런 언어적인 치장들과 무관하게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더라면...

그까짓 거, 그 말 몇 마디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일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5년 만에 처음으로 반 아이들이 다 모여있는 자리에서 내 의견을 (떨리는 가슴으로) 당당한 척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희열감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어린아이 마냥 집에 돌아오는 내내 날아갈 듯 스텝을 밟고 싶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말 몇 마디로 얻어지는 만족감이 이렇게나 대단했던 것일까....


노독에 해당하는 경우를 한 가지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언어의 부재로 인해 스스로 그 존재감을 희미하게 느끼는 데서 오기도 하고, 그 존재감을 궁여지책으로 같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뽐내 보려 하다, 이곳에서의 나와 저곳에서의 내가 일으키는 불균형에서 오기도 하고, 그저 매일 같이 밥 먹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철저한 외로움에서 오기도 하고... 그렇게 자존감에 상처 입고 외로운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여전히 과대평가하는데서 오기도 한다.

  나를 나로 지탱해주는 모든 사회적 연결망을 자의든 타의든 끊고 나와 휘청휘청 중심도 못 잡고,
방패막이 하나 없이 혼자 어쩡어쩡 기를 쓰는 나에게 스믈한 독 기운이 들어가 고이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차에, '여독'이라는 표현은 그 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었다.


'노독'은 '풀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자존감이 구깃구깃 구겨져 꼬여있는 것을 풀라는 말인지...
사랑받던 통로가(아무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라도) 막혀있는 것을 열고 인간관계를 풀라는 말인지... 노독은 다른 서술어가 아닌 꼭 '풀다'라는 서술어와 결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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