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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gevora Nov 22. 2021

빚쟁이 전상서

10년전 채권자가 해외로 도주한 나에게 온다.  

 조만간 지인이 캐나다에 유학생 엄마로 올 예정이다.

10년 남짓한 이민생활 동안 잠깐 다녀가는 지인들은 있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살려고 오는 지인은 처음이라 감회가 새롭다.


 지금 출국준비에 여념이 없을 맹여사(가명)는 머나먼 옛날 내 사회초년생 시절의 직장동료이다.

여기서 잠깐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소개를 하고 싶다.


 똑 부러지는 성격과 스마트한 두뇌 회전만으로도 이미 축복받은 그녀는 사회생활까지 잘해서 어디가나 남녀노소로부터 사랑받는 사기캐였다. 또한 작은 체구에 여리여리한 용모와는 반대로 그녀 안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내 대장부가 살고 있는 듯 했다.


 전라도 어느 지방 출신인 그녀는 아예 절 하나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절이 개인 소유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음) 재력과 불심이 탄탄한 집안의 여식인 것과는 다르게 본인은 그다지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는, 상당히 현실적이고 쿨한 캐릭터이다. (일단 종교에 관심없으면 현실적이고 쿨해보임)


 무려 이십년전, 네일샵에 현금 이백만원을 걸어놓고 기분이 꿀꿀한 친구를 데려가 네일 아트를 받게 하는 등, 씀씀이에 있어서도 남다른 스케일을 자랑했다. 그녀가 단순히 본인의 품위유지에 많은 돈을 쓰던 사람이었으면 특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서울 강남에서 직장생활하면서 사회 초년생들도 명품백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었으니깐.  

 요즘 젊은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 스물 서너살 먹은 아가씨들이 만나면 커피값이나 밥값은 대부분 더치페이를 하고, 나는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다녀도 친구에게는 커피 한 잔도 꼭 명분이 있어야지만 사주는 것이 합리적인 신세대식 소비스타일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항상 본인이 밥 값을 내겠다 우기는 그녀는 파격적으로 멋있었다.


 당시 20대 초중반이었던 나는 남들보다 결혼과 출산을 일찍하여 이제 막 걸음마를 하기 시작한 아이가 있을 때였다.

 어느날 퇴근해서 집에 와보니 아들이 피셔스 프라이스에서 나온 뚜껑 달린 럭셔리 붕붕카를 타고 신나게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당시 시부모님댁에서 얹혀 살던 때여서 어머님이 아이를 돌봐주셨는데, 어머님은 우리 부부가 주문한 장난감인 줄 아셨다가 친구가 보내준 선물이라하니 무척 놀라워 하셨다.

 

 친부모도 큰 맘 먹고 사줄만한 그 자동차는 바로 맹여사의 깜짝 선물이었다. 20대 초중반의 아가씨가 친구의 아이에게 하는 선물 치고는 규모도, 그 마음 씀씀이도, 정이 넘치게 따라서 피처에서 보글보글 흐르는 맥주 같았다.

 새 차를 뽑은 설레임에 잠 못드는 아저씨처럼, 흥분한 아이도 그날 늦게까지 붕붕카에서 나오려하지 않아 재우려고 애를 먹었지만, 내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받는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 한 켠이 무척 행복했다.

그 때 그 모델은 단종되었나 봄.


 둘째 아이를 낳고 출산휴가 중 몸조리를 하고 있을 때도 그녀는 바쁜 와중에 안부차 집까지 찾아왔다.

워낙 인기스타라 만날 사람도 많고 오라는 데도 많을 황금같은 주말에 산뜻하게 차려입고 온 그녀 앞에서 퉁퉁 부은 몸으로 나는 챙피한 줄도 모르고 갓난쟁이한테 젖을 물렸다. 연년생이나 다름없는 나의 어린 두 남매는 번갈아가며 깔끔하고 세련된 맹여사에게 똥냄새를 선사했다.  


 식사시간이 되어 배달음식이라도 시키겠다고 하자 그녀는 이제 그만 가봐야 한다며 일어났다. 나는 차마 이 난리통에 더 있으라고 붙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몸조리 잘 하라고 쿨하게 인사하며 갑자기 지갑에서 만원짜리 다섯장을 꺼내더니 다짜고짜 내 수유복 주머니에 구겨넣는다.

 

"급하게 오느라 아무것도 못 사왔어. 애들 맛있는 거 사줘"

"아... 이거 왜이래...바쁜사람이 와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얼마 안 되니깐 잔말 말고 넣어둬"

"우리 진짜 이러지말자"

"시끄러.나 간다.몸 잘 챙겨"


 우리는 흡사 고기집에서 술 기운에 불콰해진 얼굴로 서로 계산하겠다고 다투는 아저씨들처럼 오직 한국에서만 볼 수 있다는 훈훈한 실랑이를 벌였다. 당시 만 2세인 아들은 이 아줌마들이 잘 있다가 왜 싸우나 근심스런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직장생활 7년차쯤에 육아 문제로 퇴사를 하면서, 인간관계에 게으른 나는 자연히 그녀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가끔 잘 지내냐는 안부 문자도 점점 그 횟수와 빈도가 줄어들다가 무심하게도 캐나다 이민간다는 통보식 문자만 휙 보내놓고 이곳에 왔다.

 

 맹여사를 생각하면 나는 항상 먹튀한 느낌이 들어 어딘지 모르게 괴로웠다.

내 결혼과 두 번의 출산에 마음으로 축하해 준 그녀의 결혼과 출산은 정작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다.   

그녀가 나에게 뭘 바래서 먼저 베푼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인간관계에 정성이 없고 무심한 내가 소중한 인연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런 그녀가 지구 반대편에서 이제 내가 사는 동네로 온다.


 맹여사에 대한 나의 고마움을 잘 아는 남편은 벌써부터 난리이다.

정착서비스도 우리가 해 줘야하고,

집 구할 때까지 우리집에서 머물게 해야하고,

그녀의 금쪽같은 외동아들에게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사줄까 고민하는 등....

 둔하고 무심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이야기한다.

심지어는 그녀가 입주할 콘도의 욕실 샤워기가 너무 낡아서 자기가 교체해줘야겠다고 드릉드릉하다.

 사려깊음과 디테일함이 나의 오만오천배 정도 되는 남편이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하다.


그러나 여전히 쿨내 진동하는 그녀는, 이미 유학원에서 정착서비스 예약을 했다며 신경쓰지 말라,

입국할 때 공항에도 나오지 말라, 민폐끼치기 싫다 손사래를 친다.


허나 그렇게 침착하고 똑부러지는 그녀도 요즘 비정상적으로 과열된 밴쿠버 렌트 시장에서 번번히 '까이고' 나니 초조하고 멘붕이 오는 듯 했다.

 어떻게 비흡연자에 애완동물도 안키우는 그들 모자가 개 두마리 키우는 싱글녀에게 제껴지냐며 몹시 원통해 한다. 원하는 지역에서는 렌트매물이 드물 뿐더러 어쩌다 나오는 매물에는 8개의 오퍼가 들어왔다 했다.

 그래서 나는 렌트 신청시 다른 후보자들보다 집주인에게 점수를 딸 수 있도록 레퍼런스 레터를 써주겠다 했고, 이번만큼은 그녀도 사양하지 않고 열렬히 반겼다.


 사실 내가 조금 더 센스가 있고 배려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써주었을 것이나, 지금이라도 이 둔한 머리속에 그런 기특한 생각이 난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그런류의 소개서는 처음 써보는 것이라 구글에서 포맷을 검색하여 나름 간결하면서도 필요한 내용을 담았고, 다행히도 그녀는 원하는 곳에 렌트를 얻었다.

말로는 원래 다른 유력한 후보자(?)가 있었는데 아마도 레퍼런스 레터 덕에 자신에게 기회가 온 것 같다고 고맙다고 한다. 딴에는 나 듣기 좋으라고 한 이야기이고 솔직히 레터가 아니었어도 렌트는 구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멘붕에 빠진 그녀에게 정신적으로 작은 지원이나마 해준 것 같아서 정말로 뿌듯했다.


 캐나다는 신용을 무척 중시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신용거래가 전무할 수밖에 없는 이민 초기에는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많다.

 전기도 처음 연결하려면 보증금을 걸어야하고,신용카드도 담보를 설정해야지만 발급이 가능하며, 요즘은 신규이민자 모기지도 취급하는 은행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신용이란 것이 비단 돈을 꼬박꼬박 잘 갚는 것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대학을 진학하거나 취업을 할 때에도 자기 소개서에는 추천인을 꼭 명시하도록 되어있으며 실제로 전화상으로 이루어지는 레퍼런스 체크가 당락을 크게 좌우하기도 한다. 그만큼 주변 사람들에게 얻는 평판도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집주인이 예비 세입자에게 원하는 덕목을 소개서에 나열했다.

1. 렌트비를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때맞춰 낼 것.

2. 집을 깔끔하고 꼼꼼하게 관리할 것.

3. 최소 1년은 머물되 길면 길수록 좋음.

4. 파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면 더 좋음.

5. 그리고 이 예비 세입자를 추천하는 추천인의 신원 또한 확실할 것.


그런 요소를 녹여낸 렌트 계약 레퍼런스 레터를 뽀나스(?)로 지면에 실을 터이니, 또다른 맹여사들, 또는 그녀를 돕고 싶은 친구 및 지인이 적당히 살을 붙히거나 상황에 맞게 변형하여 활용해 주셨으면 한다.


Dear Sir/Madam,


My name is (추천하는 사람) who has been living in (도시이름)  since 2011 and is now working at a (   직장 ) . I am pleased to introduce my friend, (맹여사) who is currently applying for a tenant of your condo located at (렌트 집주소)


 As an owner of rental property, I genuinely understand the general expectations regarding tenants to pay rental fees without overdue payments and to manage your suite neatly.  

She is a very organized person and I have never seen her not meeting the deadline when she was my previous co-worker in Korea.


 She wants a quiet and clean environment so that her 8 year old son can concentrate on studying and staying healthy.  She found that your condo is the right place.

From my perspective, (맹여사) has a strong profile to be a welcomed tenant who will be staying for at least (three) years before going back to Korea.


 Therefore, I highly recommend (맹여사) as a tenant of your condo.

Should you have any inquiry, please feel free to contact me.

Email :

Cell :


Truly yours,

추천하는 사람 이름


 물론 맹여사에 대한 고마움과는 별개로 빠릿하고 철두철미한 맹여사에 대한 객관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소개서를 쓰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녀가 렌트계약서류를 이메일로 보내면서 한번 봐주었으면 하기에, 검토까지 해 주었다.

맹여사에게 필요한 적절한 도움을 준 것 같아서 몹시 뿌듯하다.  

아무쪼록 그녀와의 해우가 나의 해묵은 채무탕감(?)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십여년전 그녀가 내게 베풀었던 마음의 선물이 복리이자가 붙은 채로 그녀에게 되돌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P.S : 제목에 어그로를 끈 이유는 똑순이 맹여사가 캐나다,렌트 이런 검색어로 이 글을 발견하지 않았으면 해서이지 다른 뜻은 없다. 만약 그녀가 이 글을 본다면 본좌는 무척이나 쪽팔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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