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발가락 양말에 샌들 신고 순례길 완주한 이야기

by 그린망고

순례길 짐을 꾸릴 때 가장 고민하는 두 가지가 있다.


배낭과 신발.


짐은 무조건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주의라 배낭은 별 고민이 되지 않았다. 24리터 배낭에 4.8kg의 짐을 채워 갔는데, 사실 마음만 먹으면 더 줄일 수도 있었다.


신발이 골칫거리였다. 종류가 뭐 그리 많은지.

중등산화, 경등산화, 트레킹화, 샌들.

네 가지 옵션을 두고 요목조목 저울질해 보았다.


일단 발목이 올라오는 하이컷 등산화는 답답하기도 하고 신고 벗기가 불편해서 탈락이다. 땀이 차면 물집이 생기기 쉬우니 무조건 통기성이 좋아야 한다. 우천 시를 대비해 고어텍스 소재가 좋을 거 같긴 한데, 고어텍스도 발목 틈으로 비가 새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스패츠(등산용 각반)까지 착용하는 건 좀 유난스러워 보인다. (갈리시아 지방에서는 스패츠를 가진 이들이 조금 부럽긴 했다. 갈리시아 지방은 비 오는 날이 많다.)


어쨌든 나름 고심 끝에 결정한 것이 스포츠샌들이었다. 킨(Keen)에서 나온 뉴포트라는 모델로, 쿠션이 꽤 두껍고 푹신하면서 발바닥의 아치도 잘 지지해 줄 것 같았다. 앞이 막혀 있어 돌부리에 발가락을 채일 일도 없겠다. 뒤꿈치가 뚫려 있는 것이 맘에 좀 걸리지만, 뒤까지 막혀 있으면 샌들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재질과 마감도 훌륭한 것이 내구성도 좋아 보인다.


동네 마실할 때 신을 플립플롭도 따로 하나 챙겼다. 양말은 발가락 양말과 등산 양말을 각각 두 켤레씩 가져갔는데 등산 양말은 한 번도 신지 않았다.


막상 신고 걸어보니 장단이 있었다.


가장 큰 장점은 역시 통기성이다. 바람이 술술 통해 땀이 흥건하게 찰 일도 없고, 물에 젖어도 금세 마른다. 그러니 쿰쿰한 냄새도 나지 않을뿐더러 물집이 생길 확률도 현저히 낮아진다.


순례길 히트 제품 중 하나가 콤피드(물집 패치 브랜드명)인 걸 보면 물집이 얼마나 순례자들을 괴롭히는 녀석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순례길을 포함한 약 3개월의 여행 기간 동안, 1,500km가 넘는 거리를 이 샌들에 발가락 양말을 신고 걸었는데, 한 번도 물집이란 걸 구경해 본 적이 없다.


신고 벗기가 편한 것도 큰 장점이다. 걷다가 아무 데서나 신발을 벗어 놓고 널브러져 있는 걸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안성맞춤이다. 그뿐이냐. 가볍고 부드러워 발의 움직임이 자유롭고 오래 걸어도 장딴지의 피로가 덜하다.


물론 단점도 적지 않다.

자잘한 돌멩이들이 신발 틈으로 계속해서 들어가 매번 빼내는 게 일이다. 더 큰 난관은 커다란 돌이 들쑥날쑥 박힌 내리막길 구간에서다. 발목을 제대로 지탱해 주지 못해 이리저리 꺾이기 일쑤다. 등산화에 비해 얇은 바닥은 충격흡수에 취약해 돌길에선 발바닥이 수난이다.






나는 물집의 고통은 겪지 않았지만 순례길 중반부터 찾아온 다른 통증들로 한참을 고생했더랬다.


첫 시작은 정강이였다. 발을 디딜 때마다 정강이가 쪼개질 듯 아팠다. 골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한 통증이었는데 미련하게도 파스 하나로 버텼다. 설상가상으로 파스를 붙인 곳에 알레르기 발진까지 올라오더니 급기야 정강이 전체를 다 뒤덮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금 더 지나니 이번엔 발꿈치에 문제가 생겼다. 땅에 발을 디딜 수가 없을 정도의 극심한 통증으로 한동안 까치발로 걸어야 했다. 그것이 족저근막염이었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런 상태임에도 걷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몸은 고되지만 맘은 평온했다.


순례길은 다른 차원의 세상인 듯 느껴질 때가 있다. 종국에는 위버멘쉬 내지는 해탈에 이를 수도 있겠다는 다소 허망한 기대를 품게 하는 공간이랄까. 고난 끝에 구원의 환희에 다다르는 뭐 그런 어떤. 종교인이 아닌 나 같은 사람도 이런 신묘한 에너지를 받는 곳이니,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는 순례길에서의 모든 경험이 이적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순례길을 걸어본 이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것이다.




다시 샌들 이야기로 돌아오자.

이제 결론을 말하자면, 스포츠 샌들은 개인적으로 꽤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돌길을 제외하면 샌들로도 큰 무리 없이 순례길을 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여름철에 한해서다.) 물론 개인차는 있을 것이다. 발목이 약한 사람에게는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

알베르게의 신발장을 들여다보면 등산화가 대세이긴 하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이 기나긴 여정을 아무 탈 없이 함께 해 준 나의 샌들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너, 참 대단했다. 고맙다.”


언젠가 여름날의 순례길을 다시 찾게 된다면, 그때도 나는 샌들 바람으로 이 길을 걷고 있을 것만 같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