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일과에 관한 잡기(雜記)
알람은 맞추지 않았다. 자고 있는 사람들이 깰까 무서워. 아침잠이 없는 편이라 6시 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옷은 전날밤 미리 입고 잤으니 갈아입느라 부산 떨 일은 없다. 챙겨 놓은 배낭과 깔고 잤던 침낭만 반짝 들어 복도로 나간다. 침낭을 대충 접어 배낭에 구겨 넣는다. 침낭 케이스는 사용하지 않았다. 24리터 배낭을 가져갔기 때문에 공간 활용을 잘해야 했다. 케이스 째로 넣는 것보다 틈바구니에 꾹꾹 눌러 구겨 넣는 편이 공간을 덜 차지할 거 같았다. 아침마다 케이스에 말아 넣는 것도 일이다. 한 번에 쏙 들어가게 말려면 나름 스킬이 필요하다.
배낭을 로비 한편에 세워 두고, 공용 화장실에서 고양이 세수 수준의 단장을 한다. 선크림은 듬뿍 바른다. 배낭을 짊어지고 등산 스틱을 손에 쥔다.
손에 뭔가 들고 다니는 걸 워낙 싫어해서 스틱 없이 걸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장에서 만난 한 순례자가 ‘아니 이런 천둥벌거숭이를 봤나’ 하는 표정으로, 등산용품점까지 직접 끌고 가는 바람에 얼떨결에 구입을 하게 됐다. 원체 반골 기질이 다분해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편인데, 진심 어린 조언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한 짝만 사 보기로 했다.
산을 타 본 적이 없으니 스틱을 사용해 봤을 리 만무하다. 대체 어떻게 박자를 맞춰 짚어야 하는 건지, 영 어색하다. 그나마도 며칠 안가 어느 알베르게에 두고 나와 그 후로는 맨 손으로 다녔다.
손이 자유로워지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나는 손마저도 자유로워야 하는 인간인가 보다. 생각해 보건대, 스틱을 계속 사용했더라면 족저근막염이 좀 더 늦게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덕분에 사진도 맘껏 찍고 강아지들도 실컷 만졌으니.
얘기가 길어져 채비하는데 꽤나 시간이 걸린 듯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순식간에 후다닥이다.
그나저나 동이 트기 전 출발해야 한낮의 열기를 피할 수 있다.
알베르게 문을 열면 가슴이 콩닥대기 시작한다.
오늘은 또 어떤 길이,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설렘에.
한여름의 열기가 밤사이 누그러져 살갗에 스치는 공기가 시원하다. 순례길은 서에서 동으로 향하는 루트라 태양이 등 뒤에서 떠오른다. 그래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돋아나 날마다 세상을 다른 모양으로 바꾸어 놓는다.
나는 하루에 7km를 걸은 날도, 40km 가까이를 걸은 날도 있는데, 체감상 15~20km 정도가 나의 체력에는 적정한 거리인 듯하다.
하지만 순례길에서는 몸과 머리가 따로 놀 때가 많다. 이미 과부하에 걸린 몸뚱이를 머리는 눈치채지 못한다. 눈치를 채지 못한 건지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런 날에 40km를 걷게 되는 것이다. 산티아고까지라도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광인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아침나절은 일출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입을 헤 벌린 채로 감탄사만 연발하며 걷게 된다. 사진을 찍느라 걸음이 더디다. 배고픔도 잠시 잊는다. 태양이 동그란 몸체를 모두 드러낼 때쯤이면 허기가 밀려온다.
처음 다다른 마을에 운 좋게도 열려 있는 바르(Bar)가 있으면 그곳에서 아침을 먹는다. 작은 마을엔 바르도 몇 개 없을뿐더러 이른 시간에는 열지 않는 곳도 많다. 그럴 땐 다음 마을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어느 마을인가에서 요기를 하고 또다시 걷는다.
어디에 눈을 두어도 아름다운 순례길이지만, 가장 좋았던 건 하늘이다. 그렇게 커다란 하늘을 본 건 처음이었다. 눈을 돌리는 곳 어디에도 하늘이 있다. 마천루에 가려, 고개가 꺾이도록 젖혀야만 보이는 하늘이 아니다. 풀어진 솜사탕마냥 성긴 구름은 몽글몽글 꿈틀대며, 햇살 틈으로 대지에 그늘을 드리운다. 하늘만 보고 걸어도 행복한 길이다.
나는 주로 혼자 걸었다.
누군가와 동행을 하게 되더라도 이내 먼저 보내곤 했다. 같이 걸으면 풍경을 온전히 즐길 수가 없다. 시선을 상대에게 두어야 하므로. 사진에 꼭 담아야만 했던 장면을 놓치고 만다. 친목은 알베르게에 도착한 후에 해도 충분하다.
길에서 강아지나 고양이를 만나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쓰담쓰담. 궁디팡팡. 양껏 사심을 채운다. 사랑스러운 네 발의 친구들에게서 걸을 힘을 얻는다.
아침 먹은 게 다 내려갔다. 출출하다.
마을아 얼른 나와라.
마을이 나오면 다시 바르에 들러 커피와 디저트로 배를 채운 뒤, 오렌지 주스로 입가심을 한다. 스페인의 오렌지는 쏘 스윗이다. 정말 맛있다.
카페인과 비타민을 보충했으면 더 이상 지체 말고 발딱 일어서야 한다. 밍기적거리다간 스페인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혼쭐이 나는 수가 있다. 해가 중천에 오기 전에 부지런히 걸어야, 지면이 펄펄 끓는 시간을 피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걸으면서 알베르게 정보를 검색한다. 나는 카미노 닌자(Camino Ninja) 앱을 이용했다. 예약은 주로 왓츠앱(WhatsApp) 메시지로 주고받았다. 사설 알베르게 중에는 부킹닷컴에 올라와 있는 곳도 더러 있다. 공립 알베르게는 어차피 선착순이라 예약을 받지 않는다. (아, 론세스바예스의 공립 알베르게는 예외다.) 공립에서 묵을 요량이라면 새벽별보기를 각오해야 한다. 순례길의 새벽하늘은 무지막지하게 아름다우니 각오해야 마땅하다.
나는 늦어도 오후 1시 전에는 그날 머물 마을에 도착했다. 물론 체크인 시간 훨씬 전이나 한참 후에 도착한 날도 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체크인을 하고 침대를 배정받는다. 도착순으로 침대를 선택할 수 있는 곳도 있고 임의로 배정해 주는 곳도 있다. 공립 알베르게의 경우, 벙커 침대의 아랫칸은 노약자들을 위해 비워두는 곳이 많았다. 젊은이들은 자연히 위칸에서 자야 한다. 나처럼 애매한 연령대의 사람은 그때그때 다르다.
침대 옆에 배낭을 내려놓고 한숨을 돌린다. 프런트에서 받은 부직포 재질의 일회용 시트를 매트리스에 씌운다. 그 위에 영역 표시를 위해 개인침낭을 깔아 둔다.
이제 소금기 가득한 육신을 씻어낼 차례다. 샤워를 한 후, 땀에 절은 옷가지를 조물조물 빨아 볕이 함박 든 뒷마당에 널어놓는다.
내가 순례길을 걸은 건 6월 초에서 7월 중순이었는데, 갈리시아 지방으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비가 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다가도, 알베르게에 도착해 빨래를 널 때가 되면 신통하게도 하늘이 파랗게 개곤 했다.
스페인의 쨍하고 건조한 여름은 빨래 말리기에는 제격이다. 볕에 바삭하게 말린 빨래에선 보송한 햇살 냄새가 났다.
자, 지금부터가 순례길 일과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순례자에서 여행자가 되는 시간.
아침은 가볍게 서둘러 먹었으니, 점심은 든든히 느긋하게 먹는다. 순례길의 바르에는 ‘순례자 메뉴(Menu del Peregrino)’라는 것이 있다. 레스토랑의 오늘의 메뉴와 같은 개념이라 보면 되는데, 합리적인 가격에 코스 요리를 즐길 수 있다. 레몬 맥주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스페인의 레몬 맥주는 완벽한 여정의 마무리 역할을 해 준다. 상큼하고 청량한 스파클링!
아, 제일 신나는 순간! 동네 마실 타임이다.
생판 낯선 동네에서 한량처럼 빈둥빈둥 떠돌아다니는 시간이 나는 참 즐겁다. 산들바람에 하늘하늘 떠다니는 민들레 홀씨처럼, 몸도 마음도 한없이 가벼워진다.
순례길 위에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마을이 많아 동네 구경만으로 힐링이 된다. 어딜 가나 꽃과 풀이 가득하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낮잠을 자고 있는 강아지에게 말을 건네본다.
“안녕, 귀염둥아. 열사병 걸릴라. “
어쩌다 도시에 머무르게 되는 날은 특별한 루틴이 하나 있다. 아시안 마트에서 라면 사재기하기. 며칠을 산골마을만 다니다 보면 라면이 간절할 때가 있다.
성당을 둘러보고 공원도 거닐며 한가로운 오후를 보낸다. 마트 구경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스페인 슈퍼마켓 체인 중 나의 최애는 단연 메르카도나(Mercadona)다. 일단 과일과 채소가 신선하고 디스플레이가 정갈하다. 구획이 깔끔하게 나뉘어 있는 데다 공간도 널찍해 둘러보기 편하고, 식료품과 생필품의 종류도 다양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두루두루 구색을 잘 갖춘 곳이다.
저녁은 알베르게에서 순례자들과 함께 시끌벅적 커뮤니티 디너를 하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은 마트에서 사 온 샐러드와 과일로 간단하게 때우기도 한다.
저녁 9시면 슬슬 취침모드다. 다음날 입을 옷을 미리 걸친 채로 잠자리에 든다. 무얼 입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은 그야말로 편안한다.
순례길의 하루는 대략 이렇게 흘러간다.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이 인간을 이토록 평화롭게 만드는구나. 소중한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