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아이 엄마가 둘째 고민에 종지부를 찍기까지.
나는 아이가 세 살 때 수능을 봤고, 네 살에 대학에 다시 입학했으며, 여덟 살 때 졸업을 하고 그와 동시에 워킹맘이 되었다. 그 사이에 둘째를 갖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둘째를 낳았어야 했나, 아니 지금이라도 낳아야 하나' 고민을 할 때가 있다. 외동아이 엄마는 폐경 때까지 둘째 고민을 한다던데 그 말은 진짜일 수도 있다. 둘째.. 지금이라도 낳아야 할까.
둘째는 사랑
'둘째는 사랑이다. 울어도 예쁘다.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나.' 정말 많이 들어본 말이다. 둘째를 가져본 적 없는 나로서는 헤아릴 수 없다. 그럼에도 둘째를 고민하는 이유는 그저 사랑이라는 아이 하나를 더 가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내 아이에게 어쩌면 든든한 형제가 필요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이다. 외동은 외롭다, 사회성 발달이 어렵다, 형제는 무조건 있어야 한다 등등 외동아이를 향한 세간의 편견이 나에게도 작동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가 외로우면 어쩌지, 어쩌다 혼자 남으면 어쩌지 이런저런 걱정이 많았다. 놀이터나 여행지에서 형제자매끼리 노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예뻐 보이고, 한편으로 혼자 있는 내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 (이럴 땐 꼭 뒷모습이 보이더라) 그렇게 짠할 수가 없었다. 아.. 역시 하나보단 둘이 나은가? 지금이라도 노력해봐야 하나?
우리도 둘째를 가져볼까?
아이를 키우다 보면 '외동 확정! 하나로 족하다!' 싶다가도, 둘째 생각이 슬슬 들어찰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둘째를 계획해볼까 하다가도, 결국 망설였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 나는 엄마라는 위치만으로는 충만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우리 집 꼬마가 태어난 후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육아에 전념했었다. 아이는 너무 소중한 존재이고, 아이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던져버릴 수 있는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만나 경이롭기까지 했지만, 그건 그거고, 솔직히 나는 좀 많이 힘들었다. 계속되는 밤중 수유와 잦은 잠투정으로 단 하루라도 통잠을 자보는 게 소원이었고, 먹고 싸고 씻는 것조차 내가 하고 싶을 때 하지 못해 화가 났으며, 지금까지 애써 만들어온 나의 커리어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우울했다. 누군가는 육아가 사회생활보다 보람 있고 행복하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엄마라는 자리만으로 성취감을 느끼며 열정을 불태우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육아를 하는 내내 언제쯤 다시 일하러 나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엄마가 되어 행복했고 또한 불행했다. 이런 성향으로 둘째를 낳아 기른다고? 그건 아이를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옳은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둘.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부족하다. 아이가 네 살쯤 되고, 육아가 슬슬 편해지자 다시 둘째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주변에 둘째를 맞이하는 가정이 생기면서 더욱 그랬다. 가족이 늘어난다는 것은 분명한 축복이었다. 신기하리만큼 나와 남편을 쏙 빼닮은 아이를 보고 있으면 우주의 신비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래 어디 보자.. 아이가 이제 네 살이니까 지금 가지면 세 살이나 네 살 터울이겠네. 나쁘지 않은데? 그럼 슬슬 계획해볼까? 아, 잠깐! 근데 나 학교 다녀야 하는데? 하필 공부량 늘어나는 2, 3학년인데? 아, 휴학은 안되는데? 생활비는 어쩌고? 지금도 겨우겨우 생활하는데 여기에 한 명 더? 무린데? 애 케어는 어떡하고? 양가 어른들 도움도 못 받는데 나 혼자 학교 다니면서 애 둘을? 아, 이건 불가능이네?' 그땐 그렇게 둘째를 접었다.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셋, 외동 둘이 될 것만 같은 긴 터울은 싫다. 아이가 7살쯤 되었을 때,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겠단 생각에 둘째 고민을 진지하게 했다. 이번엔 나이 차이가 문제였다. 지금 갖는다 해도 7살 터울이었다. 내게는 6살과 8살 어린 남동생 둘이 있다. 동생들을 아낌없이 사랑했지만, 버거울 때도 있었다는 게 솔직헌 심정이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첫째로 자라면서 나는 세 남매의 큰누나라는 정체성으로 오래도록 살아왔다. 갖고 싶은 것을 당당히 요구하지 못했고, 하고 싶은 일들을 스스로 한 수 접는 일이 당연했다. 주는 것은 익숙하지만, 받는 것엔 미숙했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만큼은 일방적으로 양보해야 하거나 보살펴야 할 대상을 형제로 만들어주고 싶진 않았다. 육아 동반자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혹자들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나이 차이는 별 문제가 아니라고, 낳아놓으면 알아서 각자의 역할을 하며 서로 잘 챙긴다고 했지만, 그건 엄마 입장이지, 첫째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이건 내가 첫째였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엄마! 나는 동생은 정말 싫어! 차라리 언니가 좋아!!
고민이 깊어질 때면 종종 아이에게 묻곤 했다. "동생 있으면 좋겠어?"
아이는 다행히도(?) 늘 "싫어!"라고 했다. "나는 동생 정~~ 말 싫어!!!"
동생이 생기면 엄마 아빠가 동생만 안아주고 동생만 볼 거라서, 본인이 놀 때 동생이 방해할 게 뻔해서, 동생이랑 놀아도 재미가 없을 거라서 등의 이유를 댔다. 그리곤 꼭 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난 동생 말고, 차라리 언니가 좋아!! 언니 만들어줘!" 그래. 언니 너무 좋지. 엄마도 내내 언니가 갖고 싶었어. 그래서 네 마음 충분히 알지만, 그건 있잖아.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란다. 네가 어느 나라 공주가 되는 게 더 빠를지도 몰라...
둘째 대신 면허를 낳았어요!
가끔 만나는 집안 어른들이나 지인들은 아직도 나를 보면 둘째 언제 만들 거냐고, 둘째 얼른 낳으라고, 하나보단 둘이 낫다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하곤 한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하나보다 둘이 낫다는 말도 전반적으론 동의한다. 좋은 형제 있으면 평생 든든하고, 둘이 잘 놀면 부모도 편하고, 집안도 복작복작하고, 장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저는요, 이제 나이가 많아요. 지금 나으면 늦둥이고요. 애가 초등학생이 되면 제 나이 50이 다 된답니다?! 세상에 환갑에 대학생이 되겠네요!! 둘째도 막상 낳으면 너무너무 좋고,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겠지만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육아를 나이 육십까지 하고 싶진 않아요. 저는 아이도 사랑하지만 제 자신도 사랑하거든요. 둘째 낳아 키울 여력으로 밤낮으로 공부해서 한약사가 되었으니, 둘째 대신 면허를 낳을 걸로 하겠습니다. 그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인생사 원하는 걸 모두 가질 수는 없지요.
우리는 셋으로도 충만하다
내가 지금까지 둘째를 고민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둘째 버튼이 눌러질 때마다 주변에 우애 좋아 보이는 형제자매들이 있었다. 해변가에서 사이좋게 모래놀이를 하거나, 수영장에서 신나게 공놀이를 하고, 놀이공원에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상기되어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할 때, 조금 부러웠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셋만으론 부족한가? 아니. 이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셋이 있을 때 충분히 즐겁고, 행복하고, 충만하다. 우리가 셋만으로 부족하지 않은데, 다른 가족의 모습이 좋아 보여서 굳이 무리하게 애쓸 필요가 있을까? 아니. 이 또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해변가에서 셋이 모여 모래놀이를 하고, 수영장에선 아빠와 신나게 공놀이를 하고, 놀이공원에선 엄마와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 두 명이서 한 아이를 케어하다 보니 물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큰 무리가 없다. 이 정도면 족하다.
누군가에겐 둘째를 낳지 않는 변명이 될 수도 있다. 낳아봐야 안다고, 안 낳았으니 모르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말에도 동의한다. 나도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임신과 출산이 뭔지, 육아가 뭔지 아무리 들어봐도 실감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더 이런 질문을 해본다. 굳이 알아야 할까. 때론 모르는 게 낫고, 몰라서 용감하고, 몰라서 더 행복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린 진심으로 셋만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