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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하 Jul 31. 2022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피터 회

<책들의 지도> 1호 2022.07.29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지도

1. 공간

덴마크 코펜하겐(왼쪽)과 그린란드(오른쪽)


2. 인물 

**스밀라 야스페르센 - 37세

*수리공 페터 푀일


율리아네 크리스티안센 (이사야의 엄마)

이사야 크리스티안센

노르사크 크리스티안센 (율리아네의 남편, 잠수부) - 91년 탐사 중 사고로 사망


발톱 형사


장 피에르 레어만 (의사, 법의학 전문가)

요하네스 로옌 (의사, 북극 의학 연구소장, 법의학 병리학자, 부검 센터 연구소장 직무대리) - '66, '91 탐사 참가


엘사 뤼빙 (덴마크 빙정석 주식회사 수석 회계사) - 은퇴



모리츠 야스페르센 (마취외과의사) - 스밀라의 아빠

아네 카비아크 (사냥꾼) - 스밀라의 엄마


*라운 (코펜하겐 지방 검찰청 사무관)

나탈리 라운 (경찰관)

텔링 반장


다비드 빙 (변호사, 함머 & 빙 법률 사무소)

안드레아스 피네 리크트 (철학작사, 에스키모 언어 문화학 교수) - '66, '91 탐사 참가


에벨 의원 (덴마크 방정석 주식회사 이사)

오텐센 (덴마크 방정석 주식회사 수석 기술자)

베네딕트 클란 (번역가)


로이 로버 (재즈 트럼펫 연주자)


버고 라너 (수리공의 친구, 로이드 해운회사 사장)


<지오인폼 이사회>

카차 클라우센 (골동품상)

랄프 세이덴파덴 (운송 할당 전문 기술자)

*퇴어크 비드 (미생물학자, 방사선 변이 전문가)

요나단 비드 (음악가)


<크로노스 항>

지그문드 루카스 (선장)


베르나르드 야켈센 (갑판 선원)

손네 (일등 항해사)

베를렌 (수부장)

한센 (갑판 선원)

모리스 (갑판 선원)

마리아 (보조 선원)

페르난다 (보조 선원)

우르스 (주방장)


3. 사건

'66년 겔라 알타 빙하 탐사 - 폭발 사고

'91년 겔라 알타 빙하 탐사

NIFLHEIM 니플하임 (그린란드 탐사 프로젝트명, '안개의 땅'이라는 뜻)



## 밑줄 그은 문장들


그 시절 우리는 빛이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어린아이는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여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p19


고독은 내게 있어서 은혜의 불빛이다. 나는 내 방문을 닫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p.22


우리는 같은 동족으로서 인간이 여백에 써놓은 것을 보고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다. 사람들은 페르마의 사라진 정리에 대해 한참을 고심해왔다. (...) 증명되지 않은 공리를 다루고 있는 책의 여백에 페르마는 이렇게 썼다. "나는 정말로 이 문제에 대해서 놀라운 증명 방법을 발견했다. 불행하게도 여백이 너무 좁아서 쓸 수가 없다." p43


그린란드에서 익사한 사람은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바다의 수온은 4도 미만이고, 그런 온도에서는 부패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위 속의 음식물이 발효하지 않는다. 하지만 덴마크에서는 발효된 음식물 때문에 자살한 사람들의 몸속에 새롭게 부력이 생겨 시체가 바다 표면에 떠올라 해변으로 밀려오게 되는 것이다. p59


눈(雪)을 읽는 것은 음악을 듣는 것과 같다. 눈에서 읽은 내용을 묘사하는 것은 음악을 글로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p64


그렇지만 나는 삶에서 일정한 무언가를 닻처럼 내리고 있다. 그걸 방향 감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자의 직관이라고 해도 된다. 뭐라고 불러도 좋다. 나는 기초 위에 서 있고, 더이상 나아가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내 삶을 아주 잘 꾸려나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절대 공간을, 적어도 한번에 한 손가락으로라도 붙들고 있다.

 그래서 세상이 어긋나게 될 수 있는 정도, 내가 알아내기 전에 일이 악화되어버릴 수 있는 정도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이제 한 점 의심의 그림자 없이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p68


"지옥의 열쇠가 있다면요." 엘사 뤼빙이 물었다. "어디까지 갈 거죠?" p105


그의 이름은 페터다. 열세 시간 전에야 비로소 나는 그 이름을 처음 불러보았다. p111


그린란드의 지옥은 자물쇠로 잠근 방이었다. 내 유년 시절의 기억 속에서 우리는 결코 실내에 있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같은 장소에 사는 것은 내 어머니에게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나는 공간적 자유를 아이처럼 안고 있으며 여신처럼 숭배하고 있다. p144


애들은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기억할 수도 있고, 잊어버릴 수도 있고, 완전히 얼려버릴 수도 있다. p150


때때로 내가 그 애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우리가 <피터와 늑대>를 듣고 있을 때 나는 다른 일에 주의를 흐트러뜨리거나, 생각이 내게서부터 도망치고는 했다. 잠시 후면 그 애는 헛기침을 했다. 친절하게 충고하는 듯한 소리로. 그 소리는 이런 뜻을 담고 있었다. '스밀라, 지금 몽상에 빠져 있어요.' p159


"나는 확, 확실히 오늘 밤 꿈을 꿀 겁니다." p161


박하차를 마실 시간이다. 도시를 내려다볼 시간. p164


나는 창조론에 속아 넘어간 기분을 끊임없이 느끼지 않고서도 바다와 얼음을 즐길 수 있다. 태어난 아이는 찾아가야 할 것이고, 구해야 할 것이고, 별이고, 북극의 빛이고, 우주 에너지의 기둥이다. 그리고 죽은 아이는, 혐오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다. p166


그는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나도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젊은 연인이 될 수도 있었다. 서로에게 반쯤만 진실을 말하면서도 의심스러운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는 난독증 자랑쟁이와 신랄한 말괄량이 대신에. p185


불행하게도 나는 그만큼의 자신감은 없었다.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받았고 많은 것을 원했다. 그리고 진정으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끝났다. 나는 기본 교육을 받았다. 여행을 했다. 간혹 원하는 것을 해왔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계속 이끌려왔다. p186


수리공의 얼굴은 펼쳐놓은 책처럼 고통을 드러내고 있었다. p211


그린란드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영원히 물질적 부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결코 부를 추구할 수는 없었다. 아니, 진지하게 존중할 수가 없었다. 아니, 목적으로 여길 수가 없었다.

나는 때때로 쓰레기통 같은 기분이 든다. 환경이 나의 삶을 과도한 기술 문화 속으로 처넣은 것이다. 미분 방정식, 모피 모자, 그리고 지금은 0도까지 차갑게 저장해놓은 와인 한 병. p226


계단을 내려가는 길에 수리공의 아파트 문 앞에 멈춰섰다. 나는 그를 함께 데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 감정이 연약함의 한 형태라는 것을 알았다. p232


모든 것이 닫혀 있고, 어렴풋하고, 체념한 듯 했다. p232


나는 타오르는 배의 온기를 쬐며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벌거벗은 내 피부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까맣게 그슬려서 말려 올라가버린 얼마 안 되는 머리카락들도. 나는 걷기 시작했다. 파편적이고 두서가 없는 환각이 들었다. 내 어릴 때의 기억. 내가 찾아냈던 꽃, 메밀꽃, 봉오리가 달려 있는 그대로. 에버라인에 가면 내 모자를 만들었던 것과 똑같은 능라 옷감이 더 있을까 하는 생각에 발작적일 정도로 애타는 마음. 토할 것 같고 침대에 오줌을 쌀 것 같은 느낌. p238


그녀에겐 권위적인 힘이 있었다. 내 어린 시절 신의 이미지처럼. 그리고 디즈니 영화에 나오는 산타클로스처럼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 상냥함이 있었다. 만약 세계사에서 진정한 영웅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어머니들을 보기만 하면 된다. 남자들이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는 동안, 야외 그물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온실에 나가 있는 동안, 부엌에서 쿠키 종이를 들고 있는 어머니들. p246


거기 침대 속으로 행복이 내게로 다가왔다. 내게 속한 것이 아니고, 그 방과 세상을 굴러다니는 불의 전차처럼. p250


어떤 순간이 되면 이해가 찾아온다. 이해는 언제나 비언어적이다. 무엇이 낯선 것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 설명하려는 충동을 잃어버린다.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그 현상과 거리는 두는 것이다. 내가 카나크에 대해서 나 자신에게든지 다른 사람에게든지 얘기하기 시작하면 결코 한번도 진정으로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을 다시 한번 잃어버리게 된다.

지금처럼, 수리공의 소파에 앉아 내가 왜 이누이트들과 연관성을 느끼는지 설명하고 싶을 때가 그렇다. 그건 이누이트들이 한 점 의심의 그림자 없이 삶의 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자신들의 의식 속에서 화해할 수 없는 모순들 사이에서, 절망에 빠지지 않고 간단한 해결책을 찾지도 않으면서 긴장감을 지닌 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p259


탁자 너머로 나는 그의 턱 옆을 어루만지며 삶이 갑자기 우리에게 완벽한 타인과 함께 행복과 희열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방식에 대해서 경탄했다. p277


이사야의 죽음은 변칙적인 사건이며, 틈을 만들어낸 폭발이다. 이 틈은 나를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짧은 순간이었고,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움직이게 되었다. 나는 얼음 위를 지치는 외부의 생명체가 되었다. p313


그것이 바로 덴마크의 사회적 단면도의 시작이다. 수리공은 숙련된 일꾼이고, 노동자다. 율리아네는 쓰레기다. 그리고 나, 나는 누구인지? 과학자인가, 관찰자인가? 외부에서부터 삶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던 사람인가? 외로움과 객관성을 각각 동일한 비율로 섞어서 이뤄진 시각에 의해서?

아니면, 나는 그냥 감상적인 머저리일 뿐일까? p314


그때 나는 그 사람을 느꼈다. 소리도 없었으며 냄새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흔적으로 인해 나는 그의 존재에, 확고하게 우뚝 서 있는 위협에 공명했다. p315


절망이 나를 차디찬 상태로 멈추게 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절망은 잘 싸여져 어두운 구석 안쪽 어딘가에 있으면서 나머지 다른 기관을 작동시키고 실용적인 문제를 처리하도록 한다. 이런 문제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해 주고, 어쨌거나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증해준다. p334


대도시에서는 세상을 보는 특별한 방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한 점에 집중하고 있지만 간헐적으로는 선택적인 시각을 갖게 된다. p337


모든 인생은 정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을 포함하고 있다. p340


나는 단순히 바다가 내 목을 조르고 싶어 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 아니다. 바다가 무서운 것은 내 방향 감각과 삶의 내면적 자이로스코프, 위와 아래를 구별하는 능력, 절대 공간에 대한 연결성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p354


겨울은 공동체를 위한 시간이지 세상의 끝이 아니었다. p370


항해는 가만히 서 있는 것에 가장 가까운 움직임이다. 실제로 움직이고 있다고 느끼려면 지형지물이 필요하고, 지평선 위에 고정된 점과 썰매날 아래로 미끄러지는 얼음덩이가 있어야 하며, 나파리아크, 즉 썰매 뒤쪽에 곧게 솟아 있는 부분 너머로 보이는 산의 광경, 우뚝 솟아 있다가 스쳐 지나가며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리는 얼음의 진영들이 있어야 한다.

바다에는 이 모든 것이 빠져 있다. 배는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고정된 강철 받침대 위에 있다. 그 너머로 불어오는 차가운 회색의 겨울바람과 함께 영구히 순환하는 수평선으로 테를 두른 것처럼. 움직이고는 있지만 여전히 일정한 심연의 바다 위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단조로운 엔진 운동에 의해 흔들리며 배는 헛되이 한 점에서 왔다갔다 한다. p395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안개와 함께 우울이 내 안으로 떠밀려 들어왔다. p395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떠나고 돌아와야 할 집이 있어야 한다. p396


나는 내 이름인가?

(...)

그 이름은 순전히 소리일 뿐이다. 소리 너머까지 본다면, 그 소리가 돌고 있는, 액체처럼 움직이고 있는 육체를 발견한 게 된다. 그 육체가 갖고 있는 얼음에의 사랑, 분노, 갈망, 공간에 대한 지식, 약점, 불성실, 충성심도. 이 모든 감정 뒤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힘이 일어났다가 스러져가며 기억의 영상들, 이름없는 소리들은 나누어져 단절된다. 그리고 기하.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는 기하의 개념이 있다.

(...)

기하학은 우리 의식 속에 고유한 현상으로 존재한다. 외부 세계에는 완벽하게 형성된 눈의 결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의 의식 속에는 티끌 하나 없이 반짝이는, 완벽한 눈에 대한 지식이 있다. p402


대체로 내 인생은 엉망진창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옷은 언제나 깔끔하다. p415


북그린란드에서 거리는 시니크, '잠'으로 측정된다. 즉, 여행 한 번에 몇 밤을 지새야 하느냐는 것이다. 시니크의 수는 날씨나 연중  시기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고정된 거리가 아니다. 시니크는 시간의 측정 단위도 아니다. (...)

시니크는 거리도 아니고, 날이나 시간의 숫자도 아니다. 그것은 공간적 현상이자 시간적 현상이고, 공간-시간의 개념으로, 이누이트에게 있어서는 당연시되지만 유럽 언어의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공간과 동작과 시간의 결합을 나타낸다. p423


엔진은 내 앞에 우뚝 솟아 있었다. 나는 엔진을 지나쳐 걸어가야만 했다. 주입 밸브, 연료 마개, 라디에이터 파이프, 용수철, 윤을 낸 강철과 구리, 배기 다기관, 생명력 없지만 역동적인 동작까지도 함께 지나쳐서. 루카스의 검정색 작은 전화기처럼 엔진은 문명의 정수다.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 심지어 내가 이 엔진을 멈춰야 한다고 해도, 나는 그 방법을 알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 엔진은 멈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일시적으로 방해를 할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잠잠하게 멈추도록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p431


사진은 양면을 다 갖추고 있는 그의 개인적 존재감을 재생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방 안으로 발산되는 동시에 그에게로 끌어들이는 존재감의 양면을. p442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아마도 그것이 이사야가 내게 준 것이리라. 모든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의미의 감각. 바퀴가 나를 뚫고 지나가는, 그리고 그 애를 뚫고 지나가는 감각 - 광대하고 연약하지만 필요한 움직임. p454


"(...) 그리고 진짜 나쁜 종류의 얼음이 있어. 바다 안개에서 올라오는 종류. 파도도 필요 없어. 그냥 모든 걸 다 덮어버리지. 얼음은 그냥 그 자리에 있는 무엇인 거야." p456


사람들은 과도기 동안 망가져간다. 스코레스비순에서는 겨울이 여름을 잠식해갈 때 서로 권총으로 머리를 쏘기도 했다. 일이 잘되어가고 있을 때, 균형이 성립되었을 때 타성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새로운 것이다. 새로운 얼음, 새로운 빛, 새로운 감정. p460


이미 마음속에서는 완전히 발각되어 딱 맞닥뜨린 뒤 파국의 결말을 맞이하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주방에 이르렀을 때는 내 상상력이 다 고갈되어버렸다. p466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비밀의 습지 속으로. 나는 내 몸을 그에게 던져 나를 마취시킨 뒤 모든 일이 끝난 다음 깨워달라고 애걸하고 싶은 격렬한 충동을 느꼈다.

나는 결코 수리공을 알았던 게 아니었다. 몇 시간 전까지 나는 우리가 침묵으로 맺어진 유대감의 순간을 공유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린란드 스타의 승강대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우리가 언제나 낯선 사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젊었을 때는 섹스가 친밀감의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섹스는 거의 시작에 미치지도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p517


얼음을 정복하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얼음에는 거대한 저항력이 있다. (...) 물은 우리 주위에서 얼고 있다. 이 순간 나는 바다가 얼마나 우리를 가두고 싶어하는지를 알았고, 우리가 계속 가도록 허락받을 수 있는 것은 다만 물, 바람과 해류의 순전히 우연적이고도 스쳐가는 배열 때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p550


섬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북풍, 아방나크. 이 바람은 또 다른 단어로 결정화되고, 처음에는 누군가 다른 사람, 내 안의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내면의 소리로만 들린다. 피르히르후크, 눈폭풍의 날씨.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툴레에 있는 게 아니다. 이곳의 날씨는 다르다. p582


그도 인간일 뿐이다. 인간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존재를 아니다. 나는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살아 있기 위해서 언제나 노력해야 한다. p584


배 위에서는 자신의 궤적과 끊임없이 마주치게 된다. 인생에서 그런 것처럼. p586


우리는 계속 이 길을 나아갔고 나는 다시 깼다. 나는 거기 가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오래전에 나는 너무 무거워져서 어머니가 안고 갈 수는 없다.

나는 서른일곱 살이다. 50년 전 툴레에서 그 나이는 평생 수명에 해당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걷는 데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딘가 마음 깊은 곳에서 여전히 누군가 내 뒤에 나타나 따귀를 때려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모리츠가. 무언가 외부의 힘이. p588


"사물의 진정한 실체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사람들이 뭘 믿는가야." p608


"그 애는 얼음이더군"이라고 빅터는 썼다. 그 말은 완전한 진실이 아니었다. 퇴어크의 냉정함은 표면뿐이었다. 그 뒤에는 열정이 있었다. 갑자기 돌이 살아 있는지 아닌지는 내게도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갑자기 운석은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세계를 향한 서구 과학의 태도의 결정체가 되었다. 계산, 증오, 희망, 공포, 모든 것을 측정하려는 시도. 그리고 살아 있는 생물에 대한 어떤 공감보다도 더 강렬한 것. 바로 돈에 대한 욕망. p609


우리는 얼음을 이길 수 없다. p619





### 기록

 읽는 내내 맘처럼  읽히지 않아서 속상해하면서도, 이상한 힘으로 끝까지 밀어붙였다. 스토리의 진행을 이해하려는 자아와   문장도 놓치지 않으려는 자아의 치열한 투쟁 끝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그제야 사랑에 빠져버렸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어린 소년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 소설의 탈을 쓰고 있다. 하지만 실은 북그린란드와 덴마크의 은밀한 대립 구도, 얼음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오만,  같이  떨어지는 정교한 수학 세계를 향한 찬사, 눈과 얼음과 자연과 이누이트 족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경외, 그리고 차가운 이상과는 달리 결국 한낱 따뜻한 인간일 뿐인 스밀라의 끝없는 고뇌를 적은 회고록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전체적으로는 회백색, 옅은 푸른색, 차가운 어둠에 가까운 건조한 문체로 뒤덮여 있지만 이따금씩 뜨겁고 끈적한 붉은색의 무언가가 군데군데 녹아든다. 마치 단단한 얼음 사이의 갈라진 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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