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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e Nov 11. 2024

죽은 거니와 산 거니 시대

feat 시스템과 문화

10년 전 그러니까 2024년 그때는 거니의 시대였다고 기억한다. 하나는 죽은 거니이고 다음은 산 거니인데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요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이라는 게 이 거니의 아이러니였다. 과연 죽은 거니는 대로 부활하지 못하고 영원히 죽고 말았을까? 과연 산 거니는 살아도 산 게 아니게 정말 죽고 말았을까? 10년이 흘렀으니 이제는 안다. 마침내 거니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다만 그때는 아직 거니의 시대였고 죽은 거니도 산 거니도 영원히 살 것만 같았다.


먼저 죽은 거니는 비록 말년에 망신살이 뻗치긴 했지만 막대한 문화재급 미술품을 국가에 기증하며 명예를 회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식인지 삼대가 자 어김없이 말아먹는 놈이 나왔다. 워낙 많이 쌓았으니 말아먹었다고 하기에는 과도하다고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국가 경제에서의 그 중요도를 볼 때 망하고 있다는 표현은  그리 과도하지 않았다.


이게 다 거니의 잘못된 후계자 선택이었다고 부르기에는 이른 감은 있었지만 후계자는 이미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입을 다물고 전면에 나서지 않았을 때는 준수해 보이기까지 한 외모였지만 청문회에서 이 상황이 마냥 신기한지 웃음 지으며 어눌한 답변을 하는 것을 보면 이미 최고 경영자로서의 자질에 의문이 든 터였다.


그러나 경영에 있어 대주주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때 유행했던 일론 머스크도 아니고, 게다가 원천 시스템을 자부하는 초일류 기업이여전히 비범한 경영진들이 잘하고 있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후계자는 거니가 세상을 떠나고 감방에서 풀려나자 긴장감도 풀린 연유였는지 친근하지만 덜떨어진듯한 '쉿' 포즈와 함께 그 어떤 역량도 보이지 못한 채 잊히고 있었다. 그래서 죽은 거니는 죽기에도 몇 년이 걸렸는데 이제 죽어서도 편치 못하게 다시 소환되고 있었던 것이다.


살벌하게, 마치 일론 머스크처럼 쪼아댔던 그가 상사였다면 전혀 맘에 들지 않았겠지만, 생각해 보니 주주로서는 거니는 괜찮은 경영자였다. 거니라면 열등생으로 한참 밀린 이런 수모를 두고 보지도 놔두지도 않았을 것이니까. 문제는 주주로서가 아니라 국민으로서도 이 후계자의 무능과 함께 국가 경제가 추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식은 손절하면 그만이지만 국가는 손절이 불가능하다. 차라리 그를 다시 잡아들여 절체절명의 긴장감을 불어넣기라도 했다면 조심스럽지만 거니의 제국이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만약 거니가 살아있었더라면 응당 책임을 물어 동의하고도 남을 일이었기에.


다른 살아있는 또 다른 거니는 비록 초년에 위조도 하고 위법도 기꺼이 감수하며 얼굴까지 위조해 가며 어려운 세월을 나름 열심히 보낸 것 같지만 그런 노력의 선물이었는지 말년에 은인들을 만나 화려하게 명예를 드높이는 듯 보였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준 과욕을 너무 부린 것인지 오욕을 뒤집어쓴 처지가 되어 이제는 어김없이 다 말아먹어버렸다. 일찍이 입을 다물고 전면에 나서지 않았을 때에는 외모쯤이야 다듬을 수도 있다고도 생각했지만 외모뿐만 아니라 진실인 게 단 한 게도 없다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본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거니의  최고 경영자로서 자질에 심각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사실 지분 하나 없었지만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무능하고 술만 마시는 경영자를 대신해 가까운 사람이 일론 머스크처럼 살신성인한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런데 연예인 화보 촬영과 나이를 넘나드는 피부 관리와 착하게 살자 코스프레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는 나락에 나락 거듭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이들과 개를 안고 사진을 찍어도 살아온 세월을 대변하는 그 부자연스러운 얼굴을 감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법과 자본주의 시스템의 파괴는 심각하고 위험하게 다가왔다. 이제 경계해야 할 것은 북한이 아니라 북한처럼 변하고 있는 이 사회의 시스템이었다. 가 아는 이웃이었다면 어디라고 꽂아 주어 괜찮았겠지만, 심지어 신났겠지만, 그를 모른다면 능력이 있어도 이번 생은 글렀다는 자괴감에 사회가 병들어갔다. 오직 아첨하고 무능력한 자들만이 승승장구하고 한탕해 먹는 동안 차라리 능력 있고 줏대 있음을 원망하고 아이들에게는 아부학이라도 가르쳐야 할 판이었다.


이런 거니 시대와 거니 사태는 시스템이 능사가 아니라는 교훈을 남겼. 어렵게 구축한 시스템이라 해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대게 시스템보다 더 강한 권력자에 의해 내부로부터 여지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또한 그동안 구축했던 법과 자본주의 시스템이 형편없었다는 반증일 수도 있었다.


화려했던 죽은 거니의 시스템은   모래 위의 성이었고 산 거니의 시스템은 법과 자본이 얼마나 불공정하고 무력한 지를 보여주었다. 죽은 거니의 후계 시스템은 오류였고 거대 제국이 거의 멸망한 후 차라리 딸을 후계자로 삼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후대는 평가했다.


법과 자본시장은 조작을 장려하고 뒤를 봐주는 아수라로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진 뒤 제2의 IMF에 준하는 사태를 겪었다. 외국인이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며 외국인이 다시 취약하고 허점이 숭숭 뚫린 시스템을 파고들어 공격해 왔다. 환율은 다시 2,000원을 넘었고 주식시장은 개도국 수준으로 추락하고 법은 외국인과 결탁해 예외를 선언했다.


문제는 죽은 거니나 산 거니 어느 한쪽이라도 온전하면 그럭저럭 굴러라도 갈 텐데 그 어느 쪽 하나 온전치 않았다는 것이다. 경제와 정치라는 시스템의 두 축이 모두 무너져 내리고 타이어가 모두 펑크 난 채 두 바퀴는 위태로운 쇳소리를 내며 위험한 경주를 계속하고 있었. 그러다 불이 나서 전복된 사태에 이르렀는데, 한쪽에서는 차라리 불이나길 바랬던 것처럼 무면허 음주운전을 역주행으로 몰고 있었다. 그러나 사고 후 운전자는 도망쳤다.


다만 기댈 문화라는 마지막 한 축만이 남아있었다. 법도 돈도 망가진 사회에서 단지 문화로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지만, 그리고 이 마저도 빠르게 물들어 오염되고 있었지만 그동안 쌓아온 문화의 힘은 유일하게 버티게 해 주는 힘이 되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지만 쓰고 그려내노래하고 견디는 힘이었다. 문화를 경시하고 무시하기까지 했지만 법과 자본이 피폐해진 땅에 문화만이 오직 다시 꽃 피울 힘을 주었다. 사람들은 무너진 땅에 다시 또 쓰고, 그리고, 노래하여 마침내 거니의 시대의 상처에서 회복할 수 있었다. 죽은 거니는 편히 쉬었으며 산 거니는 폭주를 멈추고 죽은 것처럼 되었다. 무너진 시스템을 다시 회복하는 힘은 법과 자본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문화여야 함을 깨달았다. 죽은 거니  산 거니 든 그렇게 거니라는시대의 이름은 잊혀져 간지 10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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