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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쭈 Oct 27. 2022

<하얀 천막을 보면 난 여전히 쓸쓸하며,, 설렌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은 운치가 있었다.     


열일곱 살, 늦여름 평일 오후. 담임이 교무실로 나를 불렀고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택시를 타고 오라 하였지만 가는 버스번호를 알았다. 엄마도 모를 리 없었겠지만 나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은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도록 만드니까.     


당시엔 병원에 부속된 장례식장이 변변치 못하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병원은 대전에서 꽤나 큰 종합병원이었지만 딸려있는 장례식장은 작고 초라했다. 죽음은 병원이 보살필 바가 아니라는 듯 장례식장은 시골집의 뒷간 마냥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결국 죽었다는 건 병원 입장에선 진 것이므로 거리를 둘 선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초라한 장례식장이 할아버지의 장례를 오히려 멋스럽게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가난하였지만 그 대가로 인품이 높아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좁아터진 장례식장 안의 식당으론 손님을 다 맞이할 수 없었다. 장례식장 뒤로는 낮은 언덕이 완만하게 펼쳐졌다. 나무는 뛰엄 뛰엄 있었고 그 사이로 흙바닥은 넓었다. 새하얀 천막 지붕 수개가 경사지에 펼쳐졌다. 내 마음은 설렜다. 초등학교 운동회, 엄마가 싸준 김밥을 먹던 하얀 천막이었다. 미어지는 인파도 기분이 좋았다. 할아버지는 존경할 만한 분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천천히 음미해 보려 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가을이 오는 바람이 좋았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은 스르르, 스르르~ 쓰는 소리를 냈고, 천막은 쿨럭, 쿨럭~ 그 소리를 담았다. 담기지 못한 설익은 단풍은 붉게 떨어졌다. 주책없이 떨어지는 단풍 위로 검은 옷의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밥과 술을 먹었다.  


하얀 천막은 밤에도 하얬다. 아직 어둠은 번지지 못했다. (그래, 이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  천막의 가장자리는 땅에 박힌 줄로 팽팽하여 까만 밤을 하얗게 밀어내었다. 밀어낸 자리는 살아있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는 그 소란함이 좋았다. 약간은 경사져 바쁜 듯 뛰기 좋은 그곳을 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초가을 밤은 투명했다. 아직 나는 눈물 흘릴 감정 따위를 찾지 못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 (난 아직 모르겠어. 할아버지가 어디 있는 건지...)


할아버지는 종친회 일을 오래 하셨으므로 주변인들에게 그의 죽음은 커다란 일이었다. 과거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모임들.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또 하나의 시간이 쌓였다. (이제 되었는가..) 모두가 할아버지를 이야기했다. 부질없는 말들은 겹치다 흩어지고 또 이어졌다. 죽음을 기억하는 회상들은 초저녁 여름 해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래도 어떤 이는 깊이 울었다.     


나는 소주를 짝으로 나르고 치웠다. 빈병에선 달고 닳은 알콜이 올라왔다. 궁금해 몰래 코를 갖다 대면 끈적한 싸구려 냄새가 났다. 어떤 병엔 담배꽁초가 들어있었는데 저건 나중에 어떻게 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물을 채우면 꽁초가 올라와 스르르 빠질까? 잡스런 상념들이 마음을 차지했다. 앞뒤가 하나도 맞질 않았다. 처음 보는 것 들, 처음 맡는 냄새에 정신이 팔려 까맞게 잊고 있었다. (그래 할아버지는 이제 웃질 못한다.)    


구석의 몇몇은 화투판으로 시끄러웠다. 킥킥거리다가 탄식하였고 짧은 욕설을 기침하듯 뱉었다. 어린 나는 저래도 되는 건가 싶어 불안하였지만 아무도 말리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엉덩이가 무거운 자리에는 화투와 판돈을 넣어 판을 깔아준다 했다. ‘망자의 마지막 자리를 지켜주는 예의 그리고 보답’. 경험과 관례들이 착착 돌아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누워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맏아들인 아버지는 매우 바빠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음식만 남겨진 평상을 치우고 있으면 아버지는 건너편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평상으로 다가와 인사를 하곤 했다. 대부분 웃는 표정으로 감사하다 말을 건넸고 가끔씩 소주잔을 받아 마셨다. 담소를 나누다 고모나 삼촌이 크게 부르면 급하게 달려가 새로운 조문을 맞이했다. 나이가 지긋한 누군가는 아버지에게 다가와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장례의 절차를 조언하는 듯했다.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죽은 사람은 할아버지뿐이었다.        


오직 한 여자만이 온종일 깊이 울었다.


할아버지를 평생 어려워하던 첫째 며느리. 나에겐 큰어머니, 그리고 남편을 먼저 보낸 미망인. (未亡人 = 남편을 따라 아직 죽지 않은 사람)    


‘아직’ 이라니.. 미완결의 여자라니..  그래서 죄인.     


그녀의 살갗은 검고 주름져 있었다. 나중에, 에드바르크 뭉크의 ‘절규’를 보면서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눈, 코, 잎 모두 새처럼 작았고 볼은 거꾸로 움푹 들어가 있었다. 나머지 얼굴은 깊은 주름으로 가득했는데, 그녀 앞에 서면 모두 걱정스럽다거나 언짢은 표정이 나와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가렸고 또 조용했다.     


그녀와 일분 이상 말을 나눠본 적이 없었다. ‘큰 어머니’라 소리 내어 불러본 적도 없다. ‘어머니’도 부담스러운 데 ‘크기’까지 해야 한다니.. 어린 나에게 그녀는 커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만약 큰어머니~ 라 부른다면, 입에 발린 소리가 될 것 만 같았다. ‘그녀도 어색해하겠지’라며, 가식적인 사람이 되기보단 침묵을 택하기로 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어린 나에게 그 거리감에는 일말의 멸시가 담겨있었다.  ‘배우지 못한 여자. 왜소한 체격. 가난한 살림.’ 어느 누구도 그런 단어들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17살의 나는 보이는 대로 비교하였다. 드러내진 않아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순위를 매겨가며 공부만 하던 시절이었다. 생활기록부에 중산층이라 쓰면서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평소였다면 없는 듯, 조용히 해야 할 일을 받아했을 그녀는 뜻밖에 곡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쳐다보았다. 섞인 피가 없으니 앞서 조문객을 맞이하진 못하고 빈소 구석에 웅크려 있었다. 조문객이 들어와 절을 하면 두 손을 바닥에 집고 목을 빼어 곡을 했다. 아이고.. 아이고,,  그녀는 최선을 다해 울고 있었다. 정신을 놓고 우는 울음은 아니었다. 며느리로서 다할 수 있는 최대의 울음이랄까. 평소엔 없는 듯 조용하던 그분의 이상한 모습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바닥에 반은 엎드려있는 왜소한 체구가 이제는 커 보였다. 조용한 검은 옷들 속에서 그녀는 빛나 보이기까지 했다.


‘왜’ 목 놓아 울었 을까?

‘얼마나~’ 라 던 지 ‘어떻게~’ 라기보다는 이 질문이 적절했다. 겉으론 어려웠지만, 큰어머니에게 할아버지는 친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그래서 말 못 한, 그 한을 마지막 길에 쏟아내는 것이었을까. 아님, 어려서부터 마땅하다 마음속에 각인된 며느리로서의 의무였을까?     


그녀의 울음은 ‘진심’이었을까 ‘결심’이었을까. 평소엔 말이 없는 사람이니 아무도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낯설은 그녀의 표정, 그리고 목소리는 할아버지의 죽음만큼이나 신기한 일이었다.     


조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큰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아는 사람은 당황해했고 모르는 사람은 측은해했다. 아들 셋, 딸이 다섯인 할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자식들의 울음을 다 가져가 버리는 모양이 돼 버리자. 손아래 고모는 ‘언니 이제 그만하라’며 핀잔을 준다. 큰어머니는 잠시 그쳤지만 모두가 시선을 돌리면 뭔가를 부여잡고 다시 울었다.    


고모는 웃었다. 큰어머니에게 핀잔을 주던 그 고모는 내 손을 잡더니, “공부는 잘되니 우리 조카?”라며 희미한 웃음을 보낸다. 나는, “그냥요..”라며 배시시 답한다. 방금 핀잔을 내던 고모의 눈에는 마르지 않은 눈물이 들어 있었다. 나의 등을 쓸어준다. 어린 나는 챙겨주는 그 손길이 따뜻했다. 고모의 핀잔, 고모의 눈물, 고모의 웃음은 모두 진심이었다. 그런데 멀리 보였다. 안전한 그곳에. 살아남은 자들 속에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큰어머니는 여전히 땅을 잡고 울고 있었다. 죽어도 좋다는 듯. 푹 꺼질 듯. 이젠 무언가가 잡힐 것 만 같다는 듯이..   


할아버지의 죽음은 만져지지 않았다. 어린 내가 처음 대면한 일상의 죽음은 상상 속의 그것과 매우 달랐다. 죽은 자를 비탄하며 애도하는 영화 같은 장면은 없었다. 모두에겐 각자의 역할이 주어져 있었다. 아버지, 고모 그리고 추도하는 조문객들, 그들은 움직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그를 대신할 역할들. 슬픔이 있다면 지금은 감추어야 하는 사람들, 슬픔이 없다면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타인들.    


죽음은 죽음을 대하는 방식에 밀려버렸다. 그 이후로 장례식을, 회사며 친구며 선배의 슬픔을 듣고 가게 되었지만, 간다는 건, 가야 한다는 건 시간을 내는 일이었다. 시간을 잊는 법은 없었다. 가는 길에 마음이 바닥까지 떨어져 어쩔 줄 모르는 참담함은 없었다. (나는 제대로 살아온 것일까.)   


그중 늙은 며느리만이 뭔가를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른다.     


다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날 우리는 커다란 막에 둘러 쌓여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미 용도가 정해져 있는 그날의 하얀 천막처럼, 현실에 고정된 것들. 삶과 죽음을 경계 지어야 하는 천막처럼.. 천막은 바쁘게 펄럭였다. 어린 나에게 그 막은 하나의 신호였다. 지금도 나는 그 신호를 지키며 살아간다. 경험과 시간, 친절과 예의 그리고 보호와 안정.     


스멀스멀 겨울이 오니, 내 몸은 더 움츠러 든다.     

살아가는 방법은 살아있는 나를 지워버린다. 내일의 하루를 생각하며 죽음을 지워버린다. 죽음은 앞뒤의 시간 속에 묻혀버린다. 그러다 문득, 나의 죽음 그리고 내 아버지, 어머니, 형과 동생의 죽음을 생각하면 무방비로 주저앉는다. 나는 아무런 준비가 없다. 태연한 척 불안하다.   


난 오늘도, 살지도 죽지도, 못한채, 어정거린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가벼워졌다. 그 모든 것 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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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구절을 읽다 할아버지의 장례가 생각이 났습니다.    


여자들은 소리를 지르고 자기 얼굴을 할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시체가 안겨 가는 걸 보더니 시체를 만지려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     나는 인간의 고통을 제 것처럼 느끼는 이곳 사람들을 좋아했다. ... 나 혼자만 이성을 따지는 인간이었다. 내 피는 끊어 오르지도 못했고 정열적인 사랑도, 제대로 된 미움도 없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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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할아버지가 써 놓은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남긴 한자 원고들을 아버지는 한글로 옮겨 책을 내었습니다. 두 권의 책이 할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그리고 저에게 남겨놓은 유산입니다. 그 유산을 먹고 나도 책과 글을 좋아하게 되었나 싶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 무게가 돈보다 소중하니까요. 돈은 까먹지만 글은 보태여집니다. 그 보탬이 남은 제 인생을 좌지우지하길 바랍니다. 그건, 행복한 집착이겠지요.    


할아버지가 쓰신 책의 '첫 글'을 올립니다. 1982년 1월 10일. 그러니까 제가 세 살 배기일 때, 할아버지는 이런 글을 쓰신 거군요. 시간의 격차가 새삼 신기합니다. 가능하다면 하루만이라도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허허 웃으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제야 그런 마음이 듭니다.     


항상 늦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除夜(제야 : 섣달 그믐날 밤) 斷想(단상)>     


허멀끔한 벽에 덩그렇게 매달린 한 장의 日曆(일력)은 12월 31일이다.

꼴이 처량하기만 하다.

헤아려보니 69번째의 除夕(제석)이로구나.

이 밤이 새면 내 인생도 70이 된다는 신호인가 보다.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라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더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만은 오직 평생에 해놓은 일이 없어 삶은 헛되었고 꿈은 이슬로 사라졌는가!    


태어나니 亡國(망국)의 流民(유민)이요 살다 보니 口腹(구복 : 먹고사는 것)이 원수였다. 길 잃은 어린양은 사공 없는 破船(파선)보다 서러 웠겄만 가져다준 祖國光復(조국광복)은 두 조각난 거울이었던가! 형제가 남북으로 갈라졌고 부질없는 불장난에 江山(강산)은 鮮血(선혈)이 淋漓(임리 : 피땀물 따위가 흘러 떨어지는 모양)했다.    


우리는 살아야 하겠기에, 이대로 없어질 수는 없는 생명이기에 잿더미를 밟고 일어섰을 때, 세상은 온통 달라졌구나!    


貪慾(탐욕) 앞에는 良心(양심)이 돌아서야 했고 惡化(악화)가 良貨(양화)를 깔아뭉개던 시절, 獨裁(독재)가 民意(민의)의 탈을 쓰고 權奸(권간)의 弄奸(농간)에 善(선)과 惡(악)이 뒤바뀌는 空間(공간)에서 黑(흑)이 아니면 白(백)이어야 하는 외나무다리에 항상 먹구름이 용트림을 했다.    


한 치의 양보가 열 질의 敗北(패배)를 강요하는 風俗圖(풍속도)에서 欺滿(기만)이 常度(상도)로 통하던 밤, 黃金(황금)이 魔力(마력)을 驅使(구사)하고 權力(권력)은 하늘도 움직이던 날아! 배달의 아들 딸들이 방향 감각마저 잃었었다.     


오가는 季節風(계절풍)에 세월은 흐르는데,

아! 悽絶(처절)한 惡夢(악몽)이여! 저 마지막 日曆(일력)과 더불어 멀리 멀리 

그리고 영원히 사라지어다.


                                                                                                                            1982.1.10



  

(글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 후의 글은 첨언입니다. 잃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할아버지의 장례 글을 쓰며 할아버지가 남기신 글을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쓰신지 30여년이 넘은 글을 이제야 훌 터 보았고, 잃고 나서야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할아버지는 제가 몰랐던 그 시대의 치열하고 생생한 경험을 맞딱드리며 살아 오신 것 같습니다. 지나간 옛 것들이 다 고루하다고 만 생각했습니다. 만약 지금 만나 이야기를 해도, 제가 막 투정을 부리며 불편한 물음을 해도,, 웃으며 현명한 답을 주실 것만 같습니다. 살아계실 때는 몰랐습니다.


쓰신 글 중 일부를 여기에 올리며 할아버지를 기리고 싶습니다.  


<1934년 4월 ~ 1937년 7월> 


병자 중에는 장기 질환자, 각종 전염병 환자들이 있어 간수 들도 이곳 근무를 싫어했다. 때문에 일본인 간수는 당초부터 이곳 배치가 없고 조선인 간수도 빽이 별로 없는 사람이거나 신참 간수가 근무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빽이 없는 나는 덕분에 그곳 근무를 많이 했는데 때문에 생각지도 않은 소득을 보게 되었다. 본시 대전 형무소는 독립운동가와 공산주의자 등 사상범 가운데 장기수를 수용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오랜 감옥 생활과 모진 고문과 학대를 받은 관계로 건강을 해친 사람이 많아서 자연 병감 신세를 짓는 사람이 많았다. 


그 가운데는 여운형, 안창호, 최익환, 구연흠 등 민족운동가와 김혁, 이현상, 손용복 등 거물급 공산주의자 등이 있었다. 안창호, 여운형 선생은 내가 형무소 취칙하기 전에 이미 출옥하였고, 최익한 선생은 병감에 수용되고 있으면서 한한자전을 편집 중이었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 편집인을 지낸 구연흠 선생은 나에게 우리 민족사와 일본의 한국침략사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주었다. 또 공산주의자인 손용복, 이현상으로부터는 유물사관과 사회과학 등에 대한 이론을 경청했다. 


모두가 다 나에게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어렸을 때나 학창시절에는 전연 들어보지도 못했던 말들이었다. 형무관은 직무와 관계없는 이야기를 죄수와 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순회 감독상관에게 발각되면 징계사유가 되었다. 그러나 병감은 외진 곳에 독립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감독관도 잘 오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담당 간수는 재소자와 얼마든지 말을 주고받을 수가 있었다. 


(중략) 


그런데 지나간 오년 동안 나로서는 많은 것을 잃기도 하였지만 얻은 것도 적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아까운 청춘 오년이라는 세월과 종신지질인 위장병, 신경통은 잃은 편에 속하는 반면, 오지 농촌의 우물 안 개구리가 근대문명의 명암과 선악을 목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인생관을 형성토록 한 계기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세일계의 일본천황의 위장사 만을 강요당했던 내가 광대무변의 세계 인류사와 영세불멸의 민족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 시기도 이 기간이었다. 


재옥 중인 독립투사로부터는 찬란했던 민족의 전통사와 경술국치를 강요당한 망국전후의 통한사를 알게 되었으며, 공산주의 사상범으로부터는 자본과 노동, 유물론과 유심사관의 개념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나에게는 황홀한 향학 욕구가 점화되어 취임 당시 품고 있던 간수장 시험 준비를 내팽개치고 좀 더 넓고 깊게 알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때 역사, 지리, 문학, 과학 등 손에 잡히는 대로 탐독하는 버릇이 몸에 배기 시작했다. 

웰스의 세계문화사와 다윈의 진화론, 크로포드킹의 상호부조론, 막스의 자본론, 스미스의 국부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등등 체계도 순서도 없는 독서를 한 결과는 뚜렷한 주관 있는 공부는 되지 못했으나 여태껏 지니고 있던 봉건적 사고방식과 피압박 민족으로서의 노예망령에서 크게 해방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때부터 나의 존재는 무엇이며 지금껏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는 의문과 고민이 쌓이게 되어 형무소 간수라는 직업이 싫증나기 시작하여 결국 사표를 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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