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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미리 Apr 06. 2021

착함과 속터짐 사이

집에 돌아오는 광역버스에서 나는 그 날의 거의 대부분의 생각을 마친다. 회사에서는 생각보다는 이미 시작한 일, 이제 시작할 일, 앞으로 벌어질 일 등을 해내느라 생각다운 생각을 하기 쉽지 않다. 오늘은 지나치게 착하고 다정해서 맘 놓고 미워할 수도 없었던 속터지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아 대부분 회사 사람에 대한 생각이다.


첫 직장의 대표였던 윤씨의 말버릇은 "해 줘~"였다. 그는 시시 때때로 계약이 되어 있지 않은 걸 서비스라며 떠벌리고 다니는 게 취미였다. 그 건의 실무자는 나였으므로 최선을 다해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했다. 야근을 한창 하고 있으면 윤씨는 한마디를 더했다.


"쉬엄 쉬엄 하자~"


나는 쉬자는 말을 그보다 밉살맞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벌써 오후 10시가 넘었고, 윤씨의 서비스를 떠안고 있는 처지가 아니던가? 대표실에 박혀 전자담배를 피우는 것이 주업무라면 나는 평생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말 한마디를 하고 싶을 때마다 나와 나에게 커피나 에너지 드링크, 간식 등을 가져다 주곤 했다. 나는 그의 손이건 발이건 뭐든간이 되어 열심히 키보드를 누르고 있었다. 가끔은 좋은 점도 종종 있다. 너무 인정이 넘쳐서였을까? 바닥에 달라붙어있던 연봉과는 다르게 복지는 꽤 좋았으므로. 지금 생각해보니 복지고 나발이고 당장 도망치지 못한 게 한이다.


더욱 골때리는 건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은근히 착해서 자꾸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남에게 투머치로 관심이 많고, 자꾸 도와주려고 하는 것만 봐도 좀 멍청하고 착한 사람이지 뭐' 정도로.


그가 착한 사람이건 착한 사람이 아니건 뭐라도 상관없이 나와 더럽게 맞지 않는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된 건 윤씨와 미팅을 끝내고 돌아오는 택시에서였다. 여느 때와 같이 윤씨는 신이 나서 거래처에게 다 해주겠다고 한 참이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표정관리에 실패한 내 옆에서 윤씨는 지독하게 눈치를 봤다. 나는 정말 그에게 허언증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3개월 계약이니까~살살 하다보면 괜찮지 않을까? 안될 거 같으면 안해도 돼~진짜야~그리고 일단 내가 너무 힘들겠다 싶으면 프리랜서를 붙여 줄거고 또 유대리가 도와줄거고..."


주저리거리는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윤씨는 이미 가슴을 3번정도 두드리며 자신있으며, 싸게 해낼 것이라는 개소리를 지껄인 후였다. 그러니까 윤씨는 그냥 1시간 동안 멋진 전문가이자, 누구보다 완벽한 실무자이자, 가격까지 저렴한 최고의 거래처가 되어 상대의 칭찬과 환호를 받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내가 숨도 쉬지 않고 3개월을 일하거나, 10년 이상 경력이 있는 능력자였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었을 그놈의 서비스. 경쟁사에 비해 30%나 할인된 가격으로 엄청난 걸 약속한 그를 보고 지금 당장 택시에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날 이후 월급이 재때 입금되지 않기 시작했다. 그렇게 깎아주고 서비스를 퍼다 주는 마당에 이익이 날 리가 없다. 나도 아는 것을 정말 그는 몰랐을까? 아님 그가 따로 꾸고 있는 꿈이 있었던 걸까? 뭐든 알 수 없다. 거래처에게는 좋은 대표이자 나에게는 최악의 대표였던 윤씨. 세상은 이다지도 상대적이다.


쥐똥만큼의 월급도 제때 챙겨주지 못하던, 눈치를 살살보며 방 안에서 전자담배를 태우던 그의 아래에서 썩은 표정을 하며 일하던 나. 용기와 이유를 끌어모아 퇴사를 말하기 전까지 그 졸렬함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던 그 날들. 조금은 쓸만한 날들이 남았기를 간절히 바라던 나를 떠올리다보니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제 그만 생각을 멈추고 싶을 때쯤, 버스는 종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다음 정류장이구나!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마음 깊숙히 안정이 찾아왔다. 윤씨는 벌써 피봇을 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1점짜리 평점을 쓸 회사도 사라진 지금이지만 아직도 그는 나에게 가장 졸렬했던 사장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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