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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푸른 Aug 04. 2020

책을 먹다, 생각을 읽다

가려진 죽음/『미국의 아들』_리처드 라이트

 




진실은

편할 수 없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앵무새 죽이기』를 먼저 접했다. 미국이 남부와 북부로 나뉘었던 때, 차별이 극심했던 곳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용의자로 지목된 흑인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핀치 변호사를 정의롭게 여기기도 했다. 종국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흑인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미국의 아들』은 결코 편안한 책이 아니었다. 읽는 행위 자체가 고통이었다. 인종차별을 흑인의 관점에서,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었다. 하퍼 리 작가의 작품을 읽었을 때는 일종의 동정심을 느꼈다. 동정심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도록 만들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을 향한 안쓰러운 마음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내가 느꼈던 동정심이 위선으로 보였다. 나는 현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안타까워했다. 백인의 관점(정확히 말하자면 화자는 핀치 변호사의 어린 딸이지만)에서 인종차별을 다루었기에 『앵무새 죽이기』는 상대적으로 읽기 편했다. 여기서 편하다는 것은 읽는 내내 죄의식에 시달리지는 않았다는 의미이다. 마을 주민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핀치 변호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움츠러든 몸,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서 위축된 느낌과 함께 무력감이 전해지는 것만 같다.


Photo by Sam Burriss on Unsplash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비록 베시는 죽었지만, 비록 그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베시도 자신의 시신이 이렇게 이용되는 것을 싫어할 것임을 그는 알았다.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베시가 백인의 부엌에서 한참을 뼈 빠지게 일하고 돌아올 때면 자주 그에게 토로하던 그 기분, 계속 남들의 명령만 받다 보니 스스로 생각하고 느낄 수 없게 된 것만 같다던 그 기분이 들었다. 그는 저들이 살라고 하는 곳에서 살아왔을 뿐 아니라, 저들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해왔고, 저들과 결별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기 전까지 이런 일을 해왔고, 시키는 대로 한 다음에도, 살인한 다음에도, 여전히 저들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과 영혼, 육신과 피, 모두 저들의 소유물이고, 잘 때나 걸어다닐 때나 저들의 처사가 그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장악했다. 그것은 삶의 빛깔을 결정하고 죽음의 조건을 지시했다."

_『미국의 아들』, 리처드 라이트, 창비(2012), 3부-운명, p.464 중에서



장장 두 세기 반 동안 흑인은 인종차별에 시달렸다. 기나긴 세월 동안 차별에 맞서 투항했지만 차별은 너무도 끈질긴 나머지,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교육과 경제적인 측면, 사회적인 측면 등 많은 것으로부터 분리당했지만 이러한 것의 영향은 다른 데 있었다. 흑인에게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에 나설 힘을 빼앗아갔다. 어디서 살지와 무엇을 먹고 마실지, 어떤 곳에서 공부할지 등 모든 방면에서 선택할 권리를 빼앗겼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흑인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가 백인의 제재 아래에서만 허용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거는 그들(백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선택을 내렸다. 그 선택은 백인의 입장에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운전수로 일하던 집주인의 딸을 죽이고 말았다. 한 사람을 죽이는 것 자체를 용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을 행동에 나서게끔 만든 원인은 그에게 있지 않았다. 백인이 만들어 놓은 사회 구조, 흑인이 결코 차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천장이 문제였던 것이다.



"흐느끼며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으나사실 그는 회한에 찬 채 꿋꿋이 서서 자신의 삶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의문에 가득 찬 물음들을 던지며 응시하고 있었다. 흐느끼며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으나, 사실 그는 대적하기엔 너무 크고 너무 강한 세상에 사력을 다해 부딪쳐 나아가고 있었다. 흐느끼며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으나, 사실 그는 열성을 다해 혼란스러운 상황의 물결을 더듬더듬 헤쳐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노라면 어느 틈새에선가 가슴과 머리의 갈증을 가라앉혀줄 자비의 물을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가 우는 것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느낌을 믿었다가 그것에 배반 당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자신의 느낌을 알리려는 욕구 따위를 품었던 것인가? 그의 느낌이 다른 사람들의 가슴속에 울려퍼지는 메아리가 들려오지 않은 건 또 어째서인가? 실제로 메아리가 들려온 때도 있었다. 그러나 늘 그 메아리들은 특정 음조에 담겨 있었으니, 흑인으로서 살아가는 그로서는 처음으로 사내다움의 찬가를 떠올리게 해줬던 그 세계 안에서 체면을 구기지 않고는 응답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음조들이었다. 

영혼의 평화를 찾았다기보다는 기운이 떨어진 나머지, 흐느낌이 서서히 가라앉았고 그는 천장을 쳐다보며 누워 있었다. 자백을 한 지금, 죽음은 공공연한 미래로 확실히 다가와 있었다. 흑인으로 살면서 그가 갖게 된 느낌을 백인들 면전에 내던졌다고 해서, 하얀 얼굴들이 그를 에워싸고 구경하며 그를 치유할 수 있는 건 죽음뿐이라고 떠들어대는 판에, 어떻게 죽음에 임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판국에 죽음이 어떻게 승리가 될 수 있겠는가?" 

_『미국의 아들』, 리처드 라이트, 창비(2012), 3부-운명, p.435~436 중에서




흑인에게는 죽음도 자신들의 권리가 아니었다. 재판 과정에서 보이는 백인의 모습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백인'인 젊은 처녀를 잔인하게 죽인 '흑인'을 처벌하라고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처벌은 곧 사형이었다. 백인들이 이토록 흑인의 죽음을 원한 이유를 생각해봤다. 나의 짐작으로는 근저에 두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백인은 차별로 인한 특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흑인의 권리를 위해 인생을 바친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묵인했다. 폭력적이며 냉정한 구조 자체는 무너져야 마땅한 것이지만 백인은 원치 않았다. 무너지는 날에는 자신들이 누리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백인은 알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가 함몰된다면 잠재된 증오가 한꺼번에 자신들을 향해 폭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백인은 절실하게 원했을지도 모른다. 흑인의 죽음을. 흑인이 죽음으로써 문제가 해결되고,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으며 책임감을 덜 수 있기 때문에. 



핀치 변호사의 행위는 훌륭했다. 그 누구도 흑인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곳에서 위협을 무릅쓰고 옹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백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 수 있을지언정, 흑인이 원하는 '진정한' 삶을 보장해줄 수는 없었다. 마음의 짐을 덜고 싶어서 청소년 클럽에 흑인을 위한 '탁구대'를 지원해주는 것처럼 하나의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그 후, 

그들의 삶



   

"재판장님, 본 변호인이 변론하기 위해 법정에 섰던 수많은 경우 가운데 이처럼 굳은 확신을 마음속에 느꼈던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오늘 본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나라 전체의 운명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본인이 변호하고자 하는 것은 한 사람이나 한 인종을 넘어선 것입니다. 피고인이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암울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어떤 면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이 사람의 삶과 운명이 얼마나 미묘하고도 굳게 우리의 삶과 운명에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아마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열쇠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오늘 우리가 갖는 희망과 두려움이 내일의 기쁨과 파멸을 낳는다는 사실을 이 나라 모든 국민이 깨달을 그 드문 유리한 고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판장님, 이 법정에 불경을 범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본 변호인으로선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범죄자일 뿐 아니라 흑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까닭에 이 사람은,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우리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불리한 조건에서 이 법정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다릅니다. 물론 이 사람이 저지른 범죄와 유사한 범죄들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만 말입니다. 여러 사회적 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하나의 상징, 시험적인 상징을 뽑아내어 여기 우리 앞에 갖다놓았습니다. 관찰을 위해 현미경 렌즈 아래 갖다놓는 세균에 착색하듯, 사람들의 편견은 이 상징에 착색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끈질긴 증오 덕분에 우리는 이 작은 사회적 상징을 우리의 병든 사회유기체 전체와 관련지어 바라다볼 심리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재판장님, 본인은 단순히 비거 토머스를 이해하는 행위만으로도, 얼어붙은 충동들을 깨치고 나올 수 있으며, 여기저기 번져나가는 두려움의 형체들을 공포의 밤으로부터 이성의 빛 속으로 이끌어낼 수 있으며, 우리가 몽유병자처럼 아무 생각 없이 꿈꾸듯 참여해온 무의식적인 죽음의 의식에서 가면을 벗겨낼 수 있으리라고 단언하는 바입니다."

_『미국의 아들』, 리처드 라이트, 창비(2012), 3부-운명, p.536 중에서




차별의 악순환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무의식적인 죽음의 의식"에서 벗어났다고 확언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 사건을 우리는 알고 있다. (故)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인종차별 철폐 시위는 여러 나라를 휩쓸었다. 다른 시각으로 비거의 죽음, (故)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을 바라봤다. "비거 토머스를 이해하는 행위만으로도, 얼어붙은 충동들을 깨치고 나올 수 있으며, 여기저기 번져나가는 두려움의 형체들을 공포의 밤으로부터 이성의 빛 속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말처럼, 비거와 (故) 조지 플로이드를 이해하려 했다면 어떻게 바뀌었을까. 진정으로 차별로 억압당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원하는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할 때 질긴 차별의 고리는 끊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차별의 고리도 언젠가는 끊어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Photo by Miltiadis Fragkidi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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