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가장 사랑하지만, 영어 단어 중에 내가 아주 아끼며 자주 꺼내보는 단어가 하나 있다.
flow: '흐르다, 흘러오다, 흐름'을 뜻하는 이 단어는 의식의 흐름을 정의하는 '몰입'이라는 개념까지 아우르는참 귀한 녀석이다.
그런 flow가 이끄는 문장 'Go with the flow'의 의미는 '흐르는 대로 가라 즉 순리대로 살아라'.
나올 듯 말듯하며 끊임없이 통증을 유발하는 사랑니처럼 몇 년간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고민이 하나 있었다.
언젠가는 내가 사랑하는 내 나라와 내 직업을 뒤로하고 다른 나라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늘 뒷걸음질치곤 했었다.
새로운 공간에서 유창하지 않은 그곳 언어를 쓰며 못 알아들어도 알아들은 척하면서 속은 기쁘지 않은데 겉은 웃고 있는,
내가 나답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내 존재가 한낱 먼지 같다는 생각은 내 시야를 점점 뿌옇게 만들었다.
여행을 즐길 정도의 모험심은 있지만, 내 몸에 딱 들어맞는 삶을 아무렇지 않게 내려놓을 만큼 용감하지는 않았다 그때의 나는.
순례길을 걷고 또 걸었던 그 시간들 속에서 그리고 일상을 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늘 한 문장을 되뇐다.
'순리대로 살아라(Go with the flow)'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의 변화에 맞서 싸우다 늘 여기저기 멍 투성이가
되고 난 후에야 조금씩 깨달았다.
변화는 피할 수 없음을.
나는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가 아님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라는 고민을 가장 많이 했던 시기에 잠시 머물렀던 곳에 돌아와 있는 지금.
그 당시에 읽었던 책 한 권이 먼지 가득 쌓인 채로 책장에서 나를 반긴다.
"당신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가초와 미국 정신과 의사 하워드 커틀러의 담화를 엮은 책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본질에 대해 달라이 라마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고통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 원인과 바탕을 조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 시작은 우리가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인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대로 정지해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의 피가 순환하는 걸 생각해보세요. 피는 끊임없이 흐르면서 우리 몸을 돌기 때문에 결코 가만히 있는 법이 없습니다.
모든 것들은 변할 수밖에 없고 어떤 것도 영원한 상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만의 힘으로 똑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 당시의 나는 이 구절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불어오는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몸을 맡길 수 있을 만큼의 용기가 내 안을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