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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Nov 20. 2019

몰입할 취미가 있다는 것

몰입의 즐거움(Finding Flow)


처음으로 남편과 함께 한 달짜리 휴가를 보냈을 때의 일이다.

한 달간 태국의 최남단부터 시작해서 북쪽으로 이동하며 잘 알려지지 않은 몇몇 섬들을 평균 일주일씩 머무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

요즘에는 '한 달 살기'가 유행이라 한 나라에서 또는 한 도시에서 한 달간 유유자적하는 것에 대한 보편적 이해와 함께 정보와 경험의 공유가 넘쳐나지만, 그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찬찬히 정보를 수집하고 준비했으면 좋았으련만, 하루 12시간씩 일하던 때라 내게는 준비할 여력이 없었다. 그런 무지와 게으름을 핑계 삼은 나는 200페이지도 안 되는 책 한 권 달랑 들고 호기롭게 여행을 떠났다.


천천히 읽기에는 책의 내용이 너무 재미있었다. 하루 만에 후다닥 다 읽어버리고 대략 난감해진 나는 그래도 뭐라도 해야지 싶어, 머릿속을 들쑤셨다. 수십 년간 멈춰있어서 잔뜩 녹이 쓴 우뇌는 일할 생각이 없다는 신호를 연신 보냈다. 창의성 없이 살아온 내 탓이지 뇌 탓은 아니었다.


'여행은 내가 돈을 주고 산 시간'이라고 정의 내렸던 그 당시의 나는 어떻게라도 좀 더 가치 있게 시간을 보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급기야 경계가 모호한 파란 바닷물과 하늘을 향해 눈싸움 대결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불 보듯 뻔한 싸움에서 전패의 수모를 당한 채 충혈된 눈으로 남편은 뭘 하는지 보았다.


남편은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남편의 하루는 보통 이러했다. 무인도라 불러도 될만한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근처에 버려진 제법 큰 나뭇가지와 야자수 잎을 모아서 우리 두 명 딱 들어갈 사이즈의 몽골텐트를 만들며 몸에 땀을 냈다. 그러고 나서는 바닷물에 풍덩하고 들어가 헤엄치고 놀다가 텐트로 돌아와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 탐 행크스처럼 윌슨이라도 만들어볼까 고민하는 나와는 상반되게 남편은 몇 시간이고 한 가지 일에 깊이 몰입하며 즐거워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부럽기도 하고 남편처럼 즐기지 못하는 내 모습이 짠하기도 했다.

여태껏 먹고사는데만 집중한 나머지, 여가 시간에 즐길만한 거리 하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사실, 열심히 산 걸로 치면 남편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10살 때 신문배달을 시작으로 대학생 때 호텔에서 파트타임으로 요리한 경력까지, 다양한 일을 하며 자랐으니 말이다.

그럼 무엇이 남편과 나를 이토록 차이 나게 만들었을까?


남편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몰입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한 듯하다. 시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남편은 무엇을 하나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집중하며 그 작업 속으로 빠져들었다고 한다.

레고 조립, 만들기, 그림 그리기, 마크로메...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닌데 혼자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서 실력을 키웠단다.

반면 나는 돈이 되지 않는 일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을 주지 않았었다. 책을 읽어도 경영서나 자기 계발 관련 책만 읽었었다. 물질적 풍요에 대한 고민이 늘 우선이었고 정신적 행복을 위한 노력은 배부른 자의 사치라 치부하곤 했었다.

차이가 거기에 있었다.

남편은 비록 보상이 없더라도 자기만족을 주는 일들에 에너지를 쏟는 법과 그 행위로부터 얻는 몰입의 행복을 이해하고 있었고, 나는 그러지 못했다.


망치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한 상태로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그때부터 취미 만들기에 돌입했다. 남편처럼 혼자서 뚝딱 무언가를 만들어낼 재주가 없는 나는 다양한 분야의 작가분들의 공방에서 취미가 될만한 것들을 배웠다. 배우는 과정은 늘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만드는 방법을 기억해서 하는 창작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내 손으로 만들었지만 내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무엇을 할 때 깊이 빠져드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떠한 희열을 느끼는지도.

따로 배운 것은 아닌데 내 손을 자꾸 이끄는 그것.

내가 한글을 깨친 순간부터 내 안에 존재하고 있던 글을 쓰는 톱니바퀴에 이제야 기름칠을 한다.

남은 생 동안 꾸준히 돌아가 주길 바라며.



몰입(Flow)이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몰입의 즐거움>의 저자이자, 몰입 이론의 대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박사는 이런 말을 했다.


행복이란 우연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의식적으로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의식이 어떻게 작동하고 통제되는지 이해를 통해서 인간은 스스로의 의식을 조절할 수 있게 된다. 타고난 기질과 특성 그리고 일상의 환경과 조건을 뛰어넘는 성숙된 의식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조절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을  최적의 경험(Optimal experience)으로 정의하며, 그런 경험을 통해서 인간은 행복감을 얻을 수 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박사가 정의한 최적의 경험은 우리가 일상에서 순간순간 충분히 몰입하고 있을 때 오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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