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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오 Jan 25. 2021

산에서 추락할 때 드는 생각

전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대학 입학을 앞둔 오리엔테이션 기간이었다. 학교를 들어섰는데 키 큰 여학생이 ‘회수권’ 사는 곳이 어디냐고 말을 걸어왔다. 수위실에서 같이 버스 회수권을 사고 학교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각종 동아리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난 저기를 가 볼 생각이야’ 그 아이가 그랬는지 내가 그랬는지도 희미한데 우리는 거의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대학 가면 어떤 걸 해야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나의 어느 유전자 속에 미리 프로그램이 되어있었던 걸까. 그때 현수막에는 ‘산악회 신입회원 모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와 나는 평생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잦은 수업거부와 시험 거부로 조금 과장하자면  한 학기에 강의에 몇 번 들어가지도 못하는 시국을 지나고 있었다.  우리는  안되는 강의를  빼먹고 평일 산행까지 할 정도로 산행에 푹 빠져 지냈다.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학교 규율 하나도 어겨본 적이 없던 나였는데 갑자기 무슨 배짱이었나 싶다.


산행을 시작한 후 두어 달쯤 지나 북한산 인수봉과 도봉산 선인봉을 오른 다음부터는 우리는 암벽등반에 푹 빠졌다. 우리는 ‘바위를 한다’라고 표현했는데 선등(톱)을 선 사람이 자일을 매고 한 피치를 오르고 나서 카라비나라고 하는 고리를 걸어 바위에 확보를 하고 나서 두 번째 등반자(세컨드)가 오르고 마지막에 라스트가 오르는 식으로 인수봉 꼭대기까지 7~8 피치에 걸쳐서 완등을 하는 식이었다. 톱과 라스트를 선배들이 해주고 중간에 친구와 내가 올랐다. 인수봉을 오르던 스무 살의 나는 두려움이 없었다.

 


북한산 백운대와 인수봉의 모습

그때 그토록 열심히 바위에 오르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정상에 섰을 때에는 전후좌우 멀리멀리 바라볼 수 있는 전경이 참 좋았다. 늘 앞이 가로막혀있는 곳에 있다가 거칠 것 없는 곳에 서 있다는 벅찬 느낌도 좋았고 내 몸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땀 흘려 오른 성취감도 있었다. 어쩌면 잘한다 잘한다 해주었던 선배들의 칭찬도 한몫을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친구와 난 선배들 없이 바위를 우리 힘으로 해보고 싶었다. 싫다는 산악부 동급생 친구를 꼬시고 조금 더 겁이 없었던 내가 톱을 서고 친구가 라스트를 서기로 했다. 인수봉까지 달려간 우리는 그중 가장 난이도가 쉬운 코스를 오르기로 했다.


 ‘도레미’라는 코스였는데 인수봉에서 가장 쉬운 코스로 꼽히는 길이었다. 선두를 섰던 내가 대슬랩이라고 하는 긴 경사면을 오르고, 두 번째 피치를 오르는 중이었다. 세컨드로 오를 때는 가볍게 오를 수 있는 길이었는데 선등은 역시 선등이었나 보다. 발길을 올리면서 한순간 두려운 마음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추락하기 시작했다.


선등은 추락을 하면 오른 높이의 두 배 길이만큼 떨어진다. 올라간 높이만큼 자일이 아래로 떨어져야 멈추기 때문이다. 암벽 등반하는 사람들에겐 얘기 꺼내기도 민망한 높이에서 떨어진 경험담이지만 그때 경험은 강렬했다.


사회에 나와서 차 사고를 겪은 한 동료가 말하길 차가 미끄러지며 한 바퀴를 돌던 순간 몇 초도 안 되는 순간 수많은 생각이 지나가더라는 얘기를 했는데, 내가 도레미 길에서 떨어지던 순간이 바로 그랬다. 추락이라지만 경사면을 미끄러지며 20미터쯤 스르륵 미끄러진 것뿐이었는데 눈앞에 화강암 무늬를 스크린으로 나의 길지 않은 전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주변이 정지되고 나의 시간만 흐르며 전 생애의 희로애락이 펼쳐졌던 그 순간.





그해 76일간 홀로 태백산맥(백두대간)을 종주했던 남난희라는 산악인이 있다. 몇 해 뒤에는 여성 산악인으로는 처음으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를 올라서 유명해진 사람인데 체격은 다부지지만 키가 작다는 공통점 하나로 나도 이 사람처럼 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지게 했던 등반가이다. 추위와 배고픔과 외로움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녀의 치열한 태백산맥 종주기를 읽으며 그런 삶을 살기를 바랐던 스무 살 시절의 일이다.


안나푸르나 전경



일 학년을 열심히 산악회에서 살던 우리는 각자의 사정으로 산악회를 그만두게 되었고 다시 산을 가게 된 것은 결혼하고 아이 다 키우고 이미 몸이 무거울 대로 무거워진 중년이 한참 지나서였다. 그때  서클실에서 우리는 월간 ‘산’지에서 알프스 아이거 북벽과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했던 두 젊은 산악인의 등반기를 읽으며 등반가를 동경했었다. 두 젊은 산악인은 한 명은 등산학교 교장이 되었고, 한 명은 산에서 추락해서 유명을 달리했다.


이제 우리들은 알피니스트를 꿈꾸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토록 가고 싶었던 산을 평생 내 몫의 삶을 살아내느라 못 다녀 봤으니 죽기 전에 너도 나도 다들 간다는 히말라야 트레킹이라도 가보자 약속을 했는데 그마저도 벌써 몇 년이 지나고 있다.


젊은 시절 고산을 오르고 혹독한 등반을 했던 남난희는 이제는 ‘낮은 산이 낫다’(도서) 고 말하며 어떤 인터뷰에서는 산은 오르기보다는 바라볼 대상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녀는 치열하게 산을 오르면서 얻으려고 했던 해답을 산 아래에서 찾은 것 같았다.


친구와 나는 어쩌면 히말라야 트레킹을 못 갈지도 모르겠다. 친구는 골프에 빠졌고 나는 하산할 때 무릎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히말라야를 가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몇 해전 제주도에 가서  ‘용눈이 오름’을 오르고서 나도 알게 되었으니까. 그 오름 안에 들어가 있으니 굳이 높이 오를 것도 멀리 갈 필요도 없다는 것을, 등반가 남난희가 산 아래 살고 있는 마음이 그런 것 아니었을까. 낮고 넓은 분지를 바라보며  머리는 더없이 맑고 발아래 누운 여자처럼 부드러운 구릉들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머리 위에 빠르게 흩어지는 구름을 이고 있던 몽환적인 제주의 오름을 거기까지 오른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


지난가을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 건너편 인수봉을 보니 정상에 오른 암벽등반가들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였다. 바라보며 그 자리에 나를 잠시 놓아보는 것으로도 여전히 설레었다. 평생 별 취미도 없고 무엇엔가 빠져본 열정도 없었던 나는 유일한 취미가 등산이라 생각하고 지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만나 평생 좋아했지만 만나지 못한 채로 지낸 첫사랑처럼 가까이하지 못했지만 산행은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암벽의 정상에 섰을 때의 호쾌함이나, 설악산 공룡능선에서 압도되었던 장엄함도 내가 좋아하는 산의 모습이다. 그러나 지난가을 걸었던 지리산 둘레길에 정답게 이웃하고 있던 아름드리 나무사이로 불던 바람과, 때로 산 흙바닥에 누워 바라본 초록 잎사귀에 반짝이던 햇빛이 지금도 산행을 할 충분한 이유이고 아직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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