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로완 윌리엄스
1. 들어가며
엉뚱한 태클부터 시작하자면- 한때 성공회 신학자인 C.S.루이스와 존 스토트를 국내에서 크게 소비한 적이 있었다. (요즘엔 어떤지는 내가 잘 안 읽어서 모르겠다.) 좋은 신학자를 국내에 소개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고마운 일이고. 문제는 그들을 번역한 방식이다. 두 사람 모두 성공회에 몸담고 있는 신자 혹은 신부였음에도, 몇몇 번역가들은 두 작가의 글을 국내 주류 교파의 언어로 번역해서 소비했다. 번역이라는 게 늘 그렇지 않겠느냐고 대수롭지 않아 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조금 비릿하다. 두 작가가 말하려는 바와 그 맥락을 의도적으로 자르고 삭제했기 때문이다. 두 작가가 국내 주류 교파의 신앙 형식을 권장하고 지지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말이다. (참고로, 내 책장에 꽂힌 두 사람의 책들 중, 그들을 성공회 소속이라고 밝힌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예를 들면, 두 작가가 글에서 ‘기도’를 말할 때, 그것은 성공회적 맥락을 띤다. 침묵, 관상, 공동기도 등 성공회 내에서 여러 형식과 의미를 갖는 기도를 대부분의 번역은 평면적으로 만든다. 맥락을 상실한 ‘기도’는 넓은 폭과 깊은 의미를 빼앗긴 뒤, 결국엔 우리가 알던 그것으로 회귀한다. 남는 건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우리 편’이라는 궁색한 자긍심뿐이다. 그래 놓고 성공회를 듣보잡 취급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허다한지. 우리는 언제쯤 그런 비겁함에서 풀려날까.
몇 해 전, 존 스토트의 뒤를 잇는(물론 국내 소비시장의 관점에서) 성공회 신학자가 등장했다. 성공회 주교이면서 신학자인 로완 윌리엄스가 바로 그 인데, 최근 그의 저서들이 국내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읽힌 저서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Being Christian)일 것이다. 그는 어떻게 읽힐까. 우리는 그를 어떻게 소비할까. 그는 무엇을 말하려고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최고의 기독교 입문서 중 하나다. 번역 역시 좋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네 가지 주제를 다룬다. 세례, 말씀, 성찬, 기도가 그것이다. 로완 윌리엄스는 각 주제의 신학적인 측면보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접하는 형식이 갖는 의미를 다룬다. 형식이라고?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형식이 대관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형식 같은 거 본질과는 동 떨어진 것으로 취급받는 게 일반인 요즘, 저자는 무엇 때문에 네 가지 목록에서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할까. 흔하면서도 낯선 주제들을 저자는 어떻게 다룰까.
2. 세례
<세례>는 책 전체의 입구다. 언뜻 보면 쉬운 데다가 얇기까지 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첫 번째 관문은 <세례>다. <세례>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독자들이 책 속에서 뛰어놀 수 있는 범위 역시 달라질 것이다.
흔히 세례를 물과 관련해서는 ‘죄 씻음’을, 창조와 연관해서는 ‘거듭남’을 표상하는 그리스도교의 예식으로 생각하지만, 저자는 다소 독특한 방식으로 세례에 접근한다. ‘죄 씻음’ 혹은 ‘거듭남’이라는 정답에 쉽게 이르려고 하지 않고, 반드시 들러야 할 경유지가 있다는 듯이 다른 길로 빠져나간다. 저자를 뒤쫓다 보면 목적지가 바뀔지도, 혹은 목적지가 품은 풍경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세례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의도하신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26)
‘처음에 의도하신 인간성’이란 뭘까. 그것은 왜 예수의 세례에서 비롯할까. 우선 저자는 독자들을 성서의 처음, 즉 창조로 데려간다. 저자는 창조와 세례의 이야기에서 유사점을 발견해 낸다. “물과 성령과 음성”(25)이 그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물과 성령과 음성은 두 장면 모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즉 저자에게 세례는 새로운 창조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흔하지 않은가. 저자는 여기서 방향을 튼다.
흔히들 물을 세례와 관련해서는 씻음(또는 씻김)의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반면, 저자는 혼돈과 죽음, 심연으로 이해한다. (이는 성서학적으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예수는 세례 받을 때, 깊은 혼돈 속으로 내려간다. 그때 우리에게도 혼돈을 향한 길이 열린다. 그를 통해 우리는 혼돈의 심연으로 나아간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그리스도 공동체에 가입하는 의례인 세례는 처음부터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어둠 속으로 내려가고, 예수께서 겪었던 현실에 ‘휘말린다’는 개념과 결합되었습니다.”(24)
“이것이 뜻하는 바는, 예수를 중심으로 창조된 새 인간성은 늘 성공을 추구하고 사물을 지배하려는 인간성이 아니라, 혼돈의 심연 속에서 하나님께 손을 뻗어 잡아 주시도록 내어 맡기는 인간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또 한 가지는, 만일 누군가가 ‘당신은 세례 받은 사람을 어디서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어 온다면, 그 대답으로 ‘혼돈에 빠진 이웃들 사이에서’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성이 극도록 위협당하는 자리, 인간성이 철저히 파괴되고 상처 입고 곤경에 처한 장소들 곁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리라고 기대해도 좋다는 뜻입니다.”(27)
저자는 세례를 곧장 위로 들어 올리거나, 인간을 깨끗하게 만드는 효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반대편으로 향한다. 세례는 우리를 혼돈이라는 진흙탕으로 잡아끈다. 거기서 우리는 삶이 철저히 파괴되고 상처 입고 곤경에 처한 이웃을 마주하고 그 옆에 선다.
예수는 자신이 받은 세례 속에서 인간이 처한 혼돈에 선다. 세례 속에서 그는 내려올 뿐만 아니라 우리 속으로 걸어온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자신 안에서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이 선 자리, 즉 혼돈에 함께 서라고 말한다. 거기가 우리의 자리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받은 세례 안에서 예수는 우리의 자리에 서고, 우리는 그의 자리에 선다.
3. 말씀
두 번째 장은 ‘말씀’을 다룬다. 주제가 ‘성경’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신학자 칼 바르트 역시 『개신교신학 입문』이라는 개론서에서 성경과 말씀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저자에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대하는 사람”(47)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듣는가. 듣는 그것이 ‘말씀’인 줄을 어떻게 아는가.
저자는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는 성서를 ‘전체 이야기’로 읽기이다. ‘전체’와 ‘이야기’를 떼어보자. 성서를 전체로 읽자는 제안은 성서의 자구(字句)나 부분을 취사선택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야 할 말씀으로 여기지 말자는 뜻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런 방식으로는 말씀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읽기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까닭이다.
“우리는 전체 이야기에서 별것 아닌 작은 부분을 뽑아 그것을 우리 행동을 인도하는 모범 삼고자 하는 유혹에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56)
이야기로 읽자는 제안은, 말씀을 고정된 기록으로 두지 말자는 의미일 것이다. 성서 속 시간과 공간, 말하고 듣는 이를 과거에 묶어두지 말라는 것이다. 이야기는 여전히 계속되는 사건이다. 이야기로써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들려진다.
“성경은 ‘여기에 이야기가 있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여기에 네 이야기가 있다’고 말합니다.”(57) ... “비유들을 통해 예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 이야기에서 너는 누구냐?’입니다.”(53)
‘전체 이야기로 듣고 읽기’가 말씀에 관한 첫 번째 제안이라면, 다음 제안은 우리가 듣고 읽는 그것이 어떻게 ‘말씀’인지를 알 수 있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어떻게 ‘말씀’을 알 수 있을까. 앞선 물음에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싱거운(?) 대답을 내놓는다. 무슨 뜻일까? 오래전 어느 교부들처럼,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여전히 그렇게 하는 것처럼, 구약성서 전부를 예수에게 소급시켜 알레고리로 읽어야 한다는 뜻일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두 번 다시 로완 윌리엄스를 읽지 않을 거다.) 그렇지 않다. 그런 읽기는 저자가 앞에서 제안한 ‘전체 이야기로 읽고 듣기’와 상충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응답이 완전히 조화되는 것을 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인간의 응답을 기록한 것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그 선명한 중심인 예수를 기준으로 삼아 나머지 이야기들을 해석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64)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말씀)를 자신의 몸과 말과 삶에 고스란히 담아낸 존재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몸과 말과 삶에서 말씀을 듣는다.
4. 성찬례
예수가 받은 세례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혼돈에 들어간다면, 성찬례는 우리를 식탁으로 초청하고 받아들이는 예수의 환대 그 자체다. 예수는 성찬례에서 우리를 환대하는 동시에 우리를 환대하는 자리에 세운다. 성찬례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세례에서 일어나는 일과 같다. 예수는 우리를 자신에 자리에 세운다. 우리는 예수를 ‘먹고’, ‘먹을 것’으로 자신을 이웃에게 내어준다.
“그분은 자신이 먼저 환영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환영할 수 있도록 길을 엽니다. ... 우리는 환영받으며 환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환영하며, 또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우리 이웃을 환영합니다.”(75)
성찬례는 또한 감사의 자리다. 오늘날 교회가 흔히 재현하듯 침울한 시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저자는 성찬례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그것은 최악의 비극과 불행이 아니라, 아버지의 환영을 향해 열린 문”(80)이라고 말한다. 자연스레 그리스도인들은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티아(eucharistia)를 성찬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고 저자는 알려준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꿔야 할까.)
떡과 포도주라는 사물에서 하나님의 환대를 발견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성찬례는,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장소와 사물에 성사적 심연이 깃들어 있다는 진실을 가르쳐준다. 성찬례는 사물을 비롯한 모든 세계를 착취와 남용의 대상으로 보지 못하게 하며, 자연스레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84)을 바꾼다.
“성찬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환대를 베풀려는 신자들의 마음을 지지하고 강화시켜 줍니다. 또 우리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눈을 열고 그들도 초대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84)
5. 기도
기도란 무엇일까. (저자가 다루는 네 가지 주제 중 나는 ‘기도’라는 형식이 가장 어렵다.) 세례, 말씀, 성찬례 등을 성공회 신학과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잘 버무려서 서술한 저자는, 과연 기도를 어떻게 다룰까. 국내 그리스도교에 유난히 깊게 뿌리내린 듯 보이는 기도에 관한 관습적 사고를 로완 윌리엄스는 극복할 수 있을까. 그는 왜 <기도>를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책의 맨 끝에 두었을까. 네 주제 중에 하나로 놓을 만큼, 기도는 중요한 걸까.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하나님께 다른 방식으로 아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데서 그리스도교의 모든 성찰과 제대로 된 신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97)
이런 저런 핑계로 기도를 신앙의 주변부 정도로 취급하던 내게는 놀랄만한 선언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기도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하는 셈이니까 말이다. (이런 얘기 처음 듣는다.) 저자는 책 전체에서 유지하려던 긴장감을 <기도>에서도 늦추지 않는다. 세례와 성찬례를 통해서 예수의 자리에 그리스도인이 선다고 말하던 그의 신학적 중추는 <기도>에서도 중심을 잡는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일에 우선해서 예수의 기도가 그들 자신 안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98)
<기도>에서 저자는 앞의 세 장과는 다른 서술 방식을 취한다. 저자는 주기도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가르친 세 교부를 소개하는 것으로 네 번째 장을 대신한다. 그들은 오리게네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요안네스 카시아누스로, 저자는 각 사람을 통해 기도의 세 가지 측면을 설명한다. 이는 책 전반을 통해 설명되던 연결이다.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자기 자신이 기도와 갖는 관계다.
6. 나가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서 다룬 네 가지 주제는 두 축을 무게중심으로 갖는다. ‘인간성’과 ‘예수의 자리’가 그것이다. 두 축은 모든 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에게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자리에 선 예수의 자리에 함께 섬으로써, 참인간성을 되찾으려는 존재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예수가 열어놓은 바로 그 자리에 함께 서는 이가 곧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두께에 비해 밀도가 높다. 문장은 쉽지만 멍 때리고 읽다간 건질 게 없을지도 모른다. 짧은 지면과 따뜻한 문장 이면에 다양한 신학정보를 빼곡하게 깔아놓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인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론을 불러와야 하고, 곳곳마다 나타나는 이웃과의 연대는 교회론을 소환한다. <세례>는 은근하게 성서학을 요구하고, <성찬례>는 어느새 예배를 고민하게 할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면 풍요로운 고민거리를 제공해준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뛰어놀 공간이 충분하다 못해 자칫 발이 닿지 않을 만큼 깊다.
그리스도교 입문서를 놓고 고민하는 공동체가 있다면, 함께 읽기를 권한다. 오지랖을 조금 더 부려보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소리 내어 읽으며 대화를 나누면 썩 좋은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조만간 그렇게 할 예정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성과(?) 때문인지, 『제자가 된다는 것』, 『인간이 된다는 것』이 연달아 출간됐다. (기회가 생겨 전부 읽어보려는데) 그 외에도 그의 책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국내 기독교 시장이 로완 윌리엄스를 또 얼마나 소비할지 괜한 우려가 되긴 하지만, 부디 그의 따스한 글과 신학이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서평31.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로완 윌리엄스/복있는 사람/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