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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Feb 01. 2021

보이지 않지만, 소리를 보라고

<어느 가족>

좀도둑질이 첫 장면이지만, 그리 어둡지는 않다. 첫 장면이 건네는 분위기도, 부자(父子)로 보이는 두 인물의 표정도 밝고 경쾌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이니 좋을 건 물론이고, 거기다 내 욕심을 얹어 밝고 포근하기를 내심 기대해 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쾌하게 뚱땅거리며 영화를 받쳐주던 피아노 소리가, 불협한 소리를 내며 불길한 음정으로 미끄러진다. 불안하다. 영화가 내 기대처럼 흘러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음악이 미리 알려주는 것 같다. 고마워해야 하나.  

언제는 가족 이야기를 안 했다는 듯이, 이번엔 대놓고 <어느 가족>이다. 원제는 ‘좀도둑 가족’으로 한국판 제목과는 다르지만 ‘가족’ 이야기를 하겠다는 의지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매번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다루는 듯하면서도, 고레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늘 새롭다. 시선도, 그려내는 방식도 같은 듯 다르다. 그래서 궁금하다. ‘가족’이라는 닳아버린 주제를 이번엔 어떻게 그려낼까.

좀도둑질 후에 집으로 돌아가던 아빠와 아들이, 집 밖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던 여자 아이를 (잠시) 집으로 데려가면서 <어느 가족>은 본격적인 이야기로 진입한다. 이제 화면은 집과 가족을 비춘다. 겉모습은 여느 가족과 다를 바 없다. 늙은 노인과 그녀를 부양하는 부부, 그들의 어린 아들과 부부 중 한 사람의 동생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 거기에 방금 그들의 삶에 끼어들어온 작은 여자 아이, 그렇게 여섯 인물이 비좁은 집에 함께 사는 모습을 화면은 자연스레 담아낸다. 영락없는 가족이다.

1. ‘가족 무엇으로 이어져 있을까
난데없이 함께 살게 된 여자 아이(새로운 이름: 린)만 끼어든 건 아니다. 비좁은 집에서 함께 사는 그들은 혈연과 무관하다. 부모 자식도, 자매형제도, 부부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묶었을까. 그들을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무엇으로 이어져 있을까. 영화 <어느 가족>을 가로지르는 물음이다.

후보1. 좀도둑질.
마트에서 생필품을 훔치던 부자(父子)는, 어느 집 문 앞에 방치된 한 여자 아이를 데려와 함께 살게 된다. 그건 도둑질(유괴)일까, 구출일까? 아내(로 보이는)를 연기한 안도 사쿠라와 키키 키린이 맡은 할머니 역시 틈만 나면 물건을 슬쩍한다. 알고 보니, 어린 아들인 줄 알았던 쇼타 역시, 차에 버려진 아기를 노부요와 오사무가 데려다 키운 것이었다. 구출..이었을까? 이렇듯 좀도둑질은 영화를 떠받드는 중요한 모티프 중 하나다. 훔친 자들과 훔침을 당한 이들이 함께 사는 집. 어쩌면 그들은 서로를 훔치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가진 따스함과 온기를. 그렇게 선과 악이 뒤얽힌 도둑질이 그들을 잇는다.  

후보2. 상처와 치료.
학대를 당해 온 몸이 상처로 뒤덮여 있던 린은, 새로운 집에서 상처들을 하나씩 치료받는다. 할머니는 상처를 찾아 약을 바르고, 노부요는 상처를 어루만진다. 노부요와 린은 같은 상처를 지녔다. 상처와 치료가 그들을 잇는다. 어느 집은 폭력과 그로 인한 상처를 주지만, 어느 집은 상처를 어루만져 치료한다.

후보3. 선택.
난데없이 한 집에 살게 된 이들. 난데없다는 말은, 낳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혈연’(血緣)이라는 고리가 그들에게는 없다. 그들은 ‘낳음’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머지않아 집에 돌아갈 줄 알았던, 린은 그들 곁에 있기로 ‘선택’한다. 버림받음에 익숙한 그들은 서로를 선택한다. 그들은 ‘선택한 가족’이다. 선택과 가족이라는 부자연스러운 조합을, 영화는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후보4.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전부 경계 밖 존재들이다. 버려진 집과 차에서 그들은 산다. 독거하는 노인과 학대당한 아이, 몸을 파는 여성과, 언제 다치거나 잘려도 이상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뾰족한 사실을, 영화가 너무 평범하게 그려내는 탓에 우리는 잊기 쉽다. 아이가 사라져도, 노인이 죽어도 세상은 모른다. 그들은 없다. 그런 서로의 없음을 그들은 끌어안고 산다. 부재가 그들을 잇는다. 그들은 서로의 부재를 끌어안아 비로소 존재가 된다. 할머니가 죽자, 그들은 엽기적인 결정을 내린다. 자신들이 사는 집 바닥을 파내, 시신을 묻은 것이다. 그렇게 삶 바깥으로 밀려난 죽음과 그들은 함께 산다. 없음과 죽음을 삶으로 끌어당겨서. 영화 장면 중, 멀리서 들리는 불꽃놀이 축제를 보려고 애쓰며, 누군가 말한다. “보이지 않지만, 소리를 보라고!”

이 모든 걸 <어느 가족>은 음울하거나 무겁지 않게, 편안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더 좋다.

2. ‘알잖아. 우리만으론 역부족이야.’
일상을 깨뜨리는 건 쇼타다. 동생 린에게는 좀도둑질을 가르치기 싫었던 쇼타는, 일부러 드러나게 물건을 훔쳐 달아나다가 크게 다친다. 그 탓에 가족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다.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집과 그들을 온 세상이 주목한다. 언론이 주목하는 건, 그들의 나쁨이다. 그들은 훔쳤고, 아이를 유괴했으며, 시신을 유기했다. 그들은 가족이 될 수 없다고 세상은 판결을 내린다. 노부요는 낳지 않았으니 엄마일 수 없고, 아이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는 남자는 아빠일 수 없다. 그것이 비존재들을 향한 존재들의 판결문이다. 훔쳐선 안 되고, 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며, 시신을 버려서는 안 된다. 당신들은 틀렸다. 이 같은 존재들의 판결문은, 존재들의 주목으로 다시 비존재가 되어버린 이들에 삶에 전혀 닿지 못한다. 설명 불가능이다. 노부요는 저항하듯 말한다. ‘훔쳤다고요? 주운 겁니다. 누군가 버린 걸 주운 겁니다.’라고.

<어느 가족>은 일본 판 현대식 장발장이 아니다. 사회를 리얼하게 고발하지도, 좀도둑 가족을 선함의 영역에 세우지도 않는다. 도리어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우리를 헷갈리게 만든다. 슬픈 사연을 드러내며 인물을 변호해주는 영화들과는 달리, 그들의 동거가 선의(善意)였는지, 악의(惡意)였는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인물들을 데려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영화는 1-10까지의 선함, 아름다움, 따뜻함 같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어루만지지만, 노파가 방 여기저기에 흘린 발톱처럼 서로를 불편하게도 하니까. 가족처럼. 누가 그들을 가족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영화는 그들의 이면이나 모순만을 부각하려고 했던 게 아니다. 그들의 어두운 이면이 우리를 파고들수록, 물음은 도드라진다. 그들이 가족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어떤 것을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린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린은 다시 갇힌 문안에, 때로는 닫힌 문 밖에 방치된다. 린은 또 자신에게 ‘같이 갈래?’라고 묻는 사람을 기다리는 듯, 자신을 훔쳐갈 좀도둑 가족을 기다리는 듯 카메라를 응시한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엄청난 연기로 극찬을 받았던, 안도 사쿠라의 극 중 대사가 떠오른다. “알잖아, 우리만으론 역부족이야.” 그럼 무엇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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