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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Feb 22. 2021

권태에 반항하기, 그리고 실패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소설 제목에 말 줄임표(...)가 붙은 경우는 처음이다. 저자가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물음은 여러 차례 반복되지만, 정작 말 줄임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제목에는 왜 말 줄임표를 넣었을까. 조심스러운 권유 같은 걸까? 권유라면 누구를 향한 걸까?

브람스의 음악을 전혀 몰라도 책을 읽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소설이 딱히 음악적인 리듬이나 감각 같은 걸 지니고 있는지도, 클래식에 무지한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TV에서 방영했던 드라마처럼, 풋풋한 멜로를 그리지도 않는다. 선입견이겠지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이 주는 수줍음이나 풋풋함과 소설은 거리가 멀다. 분명 연애를 다루지만, 결코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니다.

딱히 기승전결이라 할만한 사건은 없다. 시선을 잡아끄는 이야기나, 혀를 내두르게 하는 문장도 드물다. 세계를 바라보는 거시적인 관점이나,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지도 않는 것 같다. 문제를 제시하고, 그것을 돌파해가는 힘도 찾기 어렵다. 소설은 그런 것엔 관심이 없다. 소설을 가로지르는 건, 지독한 권태로움이다. 권태에서 빠져나오려는 허우적거림이다. 시간과 그것의 심복인 반복이 삶을 에워쌀 때, 우리는 저항할 수 있을까.

“그녀가 이렇게 거울 앞에 앉은 것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나, 정작 깨달은 것은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모습을 공격해 시나브로 죽여 온 것이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사실이었다.”(9)

1. 권태, 시간, 반복
마흔을 한 해 앞둔 폴은, 무엇인가에 지쳤다. 무엇이 그녀를 지치게 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녀는, 자신과는 다르게 도무지 지치지 않는 시간을 멈추거나, 그것이 그리는 끝없는 궤적에서 탈주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지나온 시간이 주는 안온함과 바닥 모를 권태 사이에서 그녀는 갈등한다.

소설이 안락함과 권태를,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폴을 그리는 방식은 다소 평범하다. 연인 관계가 그것이니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분명 로맨스 형태를 띤다. 폴과 로제, 그리고 둘 사이에 끼어든 이십 대 청년 시몽까지 더하면, 소설은 삼각관계를 다룬다. 이렇게만 보면, 소설은 세 인물 간의 사랑과 갈등을 다룬 로맨스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폴의 갈등은 로제와의 관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내 생각에 소설은 진실한 관계, 사랑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갈등은 시간에서 비롯한다. 폴이 로제와 만난 6년이라는 시간과 그것의 피조물인 반복에서 비롯한다. 소설의 시작에서 폴은, 늘 그렇듯 로제를 기다린다. 로제는 전화를 걸어 늦는다고 말할 것이고, 그녀는 괜찮다고 대답할 것이며, 그의 조수석에 앉은 그녀는 라디오를 켜 주파수를 맞출 것이다. 라디오를 켜서 주파수를 맞추던 그녀는 문득 생각한다. “내가 이런 동작을 몇 번이나 했을까?”(14) 폴은 시간이 오만하게 만들어 낸 반복을 눈치챈 것이다. 반복은 자신이 끝나지 않는다는 듯이 그녀를 속이려 했지만, 폴은 늙어가고 있었으니까. 이미 눈치챈 진실을 외면할 방법은 없다.

영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2.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시몽은 폴에게 묻는다. 시몽은 폴보다 16살 어린 ‘지나치게 잘생긴’ 청년이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시몽은 폴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그녀와 로제 사이의 안온함에 침입한다. 브람스가 어떤 음악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은 시간과 반복이 그리는 궤적 외부에서 내부로 틈입하려는 침입자다. 시몽은 폴을 반복이라는 굴레에서 탈주하게 하는 마중물 같은 인물이며,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할 외설적인 존재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은 폴이 머물던 시간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다. ‘시간이 만든 반복 속에서 당신은 누구냐?’는 도발적인 물음이다. 오이디푸스 신화가 넌지시 일러주듯, 자신이 누군지를 묻는 물음은 언제나 위험하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60)

그렇다면 이제 소설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고전적인 서사로 옷을 갈아입을까.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를 저자 역시 따라갈까. 그렇다면 시몽은 폴에게 모험일까. 시몽이라는 외부에서 폴은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어느 날 폴은, 시몽의 옷소매를 매만져주는 자신을 발견한다. 로제에게 늘 하던 것처럼. 탈주라고 여겼던 폴에게서도 어떤 역할을 되풀이하는 자신을 마주한 것이다. 시몽과 함께 하면서 폴이 마주한 건, 진정한 자신 같은 게 아니다. 역할을 맡은 자신이다. 여전한 반복 속에서 연기하는 자신이다. 그녀는 하던 것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면을 벗어도 또 다른 가면을 쓴 자신을 볼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 누군가의 지적처럼 말이다. 소설 속엔 진정한 자신 같은 건 없다. 저자가 뜻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체 같은 건 없다고, 그런 건 애당초 없었다고 쓸쓸하게 속삭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폴은 실패한다. 반복이라는 관성에 저항해보지만, 다시 안온함에 궤적에 몸을 싣는다. 로제에게 돌아간 것이다. 익숙한 반복과 권태 속으로.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차 조수석에서 라디오를 켜는 역할로. 시몽이라는 탈주자인 ‘그’가 아니라, 시간을 보편으로 받아들인 안전한 ‘우리’에게로. 하기야, 진정한 자신 같은 게 없다면, 그녀의 시도를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게 역할이고, 또 연기라면 실패라는 말은 그녀에게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쓸쓸함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프랑수아즈 사강, 1935 ~ 2004

3. 시지프스와 브람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어쩌면, 굴러 내려온 바위를 언덕에 밀어 올리는 무의미한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 이야기를 다시 쓴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알베르 까뮈는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비극적인 삶(권태로운 삶)에 대한 최선의 저항은 자살이 아니라, 삶을 끝까지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지프스가 받은 형벌이 삶의 비극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삶에서의 탈주가 아니라, 삶이 곧 저항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에 대해 프랑수아즈 사강은 뭐라고 말할까? 코웃음을 칠까. 글쎄. 분명치 않다. 반복 안에서 로제와의 권태로운 관계를, “이 애매한 싸움이야말로 그녀의 존재 이유였다.”(146)고 말하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까뮈에 공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이처럼 철학적이거나 거시적인 주제를 다루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아닐 것이다. 그녀가 감각하고 관심하는 세계를 그렸겠지. 세 사람의 관계와 그들 사이에 흐르는 감정만으로 훌륭하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시간에서 비롯한 관성에 대한 저항을 그녀의 방식으로 쓴 책이라고 믿는다. 물론 쓸쓸한 실패까지도. 그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우리에게 브람스를 좋아해 보라고 망설이며 말을 건네는 건 아닐까.



38. 서평: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프랑수아즈 사강 / 1959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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