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ipoong May 08. 2023

제1장 1988년도 가을 아침조회 (2/4)


:: 1988년도 가을 아침조회 2부 (2/4)




바람 한줄기에,  

만국기들은 마치 현악기처럼,

빠르게 떨며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지난 주말,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땅따먹기를 했었기 때문에,

수돗가 옆 버드나무 땅바닥에는

커다란 네모 및 각도기 그림과 삼각형 그림이

손지운 자국과 작은 돌들과 함께

삐쭉빼쭉 점선면을 이루고 있었다.

  


또 현관 옆 스탠드 블록에는,

‘일이삼사(1234)’를 했었기에,

크고 작은 네모 세모가 바닥에 옅게 그려져 있기도 했다.

주변으로는 비석 치기에 쓰인 납작한 돌덩이가

몇 개씩 흩어져 있기도 했고 말이다.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네~!"

 


건물 안쪽은 이미 웅성이고 있었다.

이제 모종의 힘과 활력으로,

검은 머리 아이들이,

학교 건물에서 쏟아져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건물 현관이었다.

아이들은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 있었다.

  


복도와 계단에서 들리는 서로를 향한 온갖 경쾌한 소리들.



교실문이 열리는 소리와 웅성이며 달리는 소리가 있었고,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불러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있었다.



어떤 교실문이 열리자,

흰 양말에 하얀 체육복의 어린이들이,

줄지어 쏟아지기도 했다.



질서 있는 소음들이 복도를 통해 울렸으며,

이 소리 뒤로는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소리들,

또한 동시에 지루한 미래를 예감한 듯한 하품 소리들이

다른 소음과 함께 길고 길게

건물 현관까지 이어져 울렸다.



신발장 부근의 바닥은

금색 띠를 두른 점박이 돌바닥이었고,

신발장 앞은 아이들로 붐비어 있었다.



한 아이가 하얀 실내화를 신발장에 꽂았고,

한 아이가 자기 운동화를 뽑아 바닥에 던졌다.

운동화가 복도 바닥에 반듯하게 떨어질 때는

도톰한 소리가 신발장 현관 천장에 울렸다.



경우에 따라서 멍청한 아이의 멍청한 신발이

현관 앞 계단까지 멀찌감치 떨어질 때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 옆으로 넘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많은 멍청이들 중 한 명이었던 나는,

깨금질로 다가가 약간의 요령으로

운동화를 바로 세워 신을 신었다.

나는 제법 뚱보였지만,

깨금질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침 햇살이 현관 지붕을 스치듯 들어와

신발장 현관 안쪽까지 볕을 비추고 있었다.

현관 창을 통과한 빛과 그림자도,

아이들의 양말과 신발 위로 떨어지며,

빛 빗금을 긋고 있었다.

현관 바닥에 격자형 금선들도,

작게 반짝이고 있었고 말이다.



아이들은 현관 밖, 빛을 향해 걸어 나오며

맑은 하늘을 향해 약 주먹을 쥐고 팔을 팔을 뻗었다.



기지개를 켜는 아이들은,

종종 까치발에 엉덩이에 힘을 주고

엉거주춤에 또 엉거주춤을 하며

‘으윽!’하고 소리를 내기도 했다.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분출이었다.



어떤 아이들은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

손가락을 운동화 뒤꿈치에 집어넣으면서,

현관까지 깨금질로 나오고 있었고,

어떤 아이들은 현관 쪽 계단을

하나씩 빠르게 밟아 달려 내려오기도 하였으며,

또 어떤 아이는 무엇이 급한 것인지

-위험하게도- 두 계단씩 해서 내려오기도 하였다.



계단 옆 제법 높다란 스탠드를 통해 내려오는 아이와,

스탠드를 내려올 때,

한 발 한 발 그 커다란 보폭을 그리기도 하는 아이.


  

이런 아이들은 운동장에 점프를 하기도 했는데,

마지막에 운동장에 착지할 때는,

황토색의 운동장에 아이들의 그림자가

또각하고 떨어지곤 했다.


 

방금 전, 현관 실내화장에서

운동화를 갈아 신은 내 친구 구재석은

땅바닥을 끌듯이 끊어 차며

비석을 발로 차서 다른 비석을 맞추어 내고 있었다.

별명은 제비였다.



비석끼리 부딪히면 둔탁한 소리가 나기도 했고,

비석이 약간의 높이를 갖고 튀어 오르기도 했는데,

현관을 나오던 한 선생님이 이를 발견할 때면,

돌을 쥐어 화단 한쪽으로 치워 던지곤 하였다.

  

  

남자아이들 중에는

머리를 깡뚱하게 스포츠로 짧게 자른 아이도 있었다.

우리 반 황소가 그랬다. 황소는 별명이다.



또 짧은 스포츠형이면서도,

앞머리만은 길게 길러,

짐승 털가죽을 쓴 것처럼 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남준혁이 그랬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 남자아이들은,

귀를 덮을 정도로 옆머리를 기르고

뒷머리도 아래 목까지 길게 길러,

전체적으로 마치 오토바이 헬멧을 쓴 것 같아 보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멀리서 헬멧 머리 어린이들이 운동장을 내달리고 있었다.

운동장을 내달리는 어린아이라…,

뭐, 조회 운동장의 흔한 모습이었다.

다른 한 아이가 아무 소리도 없이

앞의 아이를 진짜 한참이나 쫓고 있었다.

도망가는 아이는 속도를 높이기 위해

손날을 뾰족 세우고 고개를 높이 들었다.

  


앞의 아이가 제법 멀찌감치 달아나자,

쫓던 아이는 달리기를 멈췄고,

그것을 모르던 앞 아이는 제법 더 달려 나가더만

이윽고 뒤를 돌고 속도를 줄이더니

뒷걸음질로 깡총걸음을 했다.

포기한 친구에게 뭐라 소리치면서였다.



이 아이의 깡총 뒷걸음에

아이의 머리칼은 들렸다 내렸다 했다.

아침햇살로 인해,

솟았다 내려앉은 머리에는 하얀 햇살이 맺혀 있었고,

목덜미에는 구슬땀이 반짝이며 맺혀 있었다.

  


제법 또렷한 횟가루 트랙 위로

어떤 아이가 몇 발자국씩 성큼 걸음을 걷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면서였다.

이것은 운동장 바닥에 꽂혀 있던 비닐 꽃들로,

꼭 그걸 밟고 걸어야 했던 이유는 없었으나,

자기 보폭이 그 정도를 충분히 감당하자

마음에서는 이상시레 작은 기쁨이 솟아 나왔다.



동관에서도 아이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모든 현관 구멍과

그 주변은 어수선해져 있었고,

재동 어린이들은 사탕 개미처럼

운동장 단상 주변으로 너르게 퍼져있었다.



단상 앞에 한 여학우가 보였다.

앞머리를 반달 모양으로 내리고 있던 송 모양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이쁜

우리 반 부반장이었던 것인데,

영리한 독자라면 대강 대충 예상할 수 있을 테지만,

불쌍하게도 이 여학우,

이 착한 여학우, 이 착한 천사는, 나의 호감을 받고 있었다.

아무런 죄가 없었는데도,

내 멍청한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단상 반대편으로는, 어떤 여자아이가

파마 결을 살리며 뒷머리를 묶어 두고 있었다.

이때 뒷머리는 먼지떨이개처럼 보였기에,

특히 남자아이들에게는 꼭 그렇게 보였기에,

모여있던 남아 무리 중 하나가 이렇게 소리치기도 했다.

“먼지떨이개다! 야! 먼지떨이개! 야! 너! 먼지떨이개!"  

 


고개를 돌리면 사실 당하는 것이었지만,

또 그것을 여자 어린이는 잘 알고 있었지만,

파마 아이는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거기에는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대신 이 여자 어린이는 고개를 돌리는 즉시

얼굴을 찡그려 보이며 남자 어린이를 째려보았다.

입 양 끝을 꽤나 늘어뜨리고,

아래턱과 미간에 최대 힘을 주면서였다.



여자 어린이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일 때면,

- 하지만 어쩐지 뭔가 귀여운 그 표정을 확인할 때면,

남자 어린이들은 묘한 성취감을 느끼곤 했다.

  


“왜? 뭐? 아닌데? 너 아닌데? 너한테 한 거 아닌데?”



단발머리를 한 여자아이도 있었다.

단발머리를 한 경우에는,

뭉치단의 머리칼이 어깨 위에서 찰랑이곤 했고,

플라스틱 하얀 머리띠로 올백머리를 넘긴 경우에는,

힘없는 몇 가닥의 머리칼이

이마에서 빠져나와 있곤 했다.

  


하얗고, 또 노랗고, 또 반짝이던 머리띠.



이것은 마치 손오공의 금강고를 떠올리게 했으므로,

남자아이들은 “와! 손오공이다!”라고 소리쳤다.

이에 여자아이가

“난 여잔데? 무슨 손오공이야?!” 하고 재빠르게 대꾸해 버린다.



그 대꾸는, 잠시 거기에, 작은 공백을 만들었다.

상당히 뭔가, 잘못 알고 있다는 투였기 때문이었다.

남자아이들은, 잠시 뭔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자 꼬마전구가 켜진 듯했고,

갑자기 한 남자아이가,

세상 최고로 근엄한 표정으로 이렇게 소리쳤다.

침을 튀기면서였다.



“넌 공주가 아니야! 절대!

오로라 공주가 아니라고! 절대!”



거기 학교 운동장,

거기 사막 풍의 황토색 학교 운동장에서,

한 남아(男兒) 영혼이 보여주는 따끔한 훈계조 태도는

자못 진지한 것이었다.

그 외침과, 거셈과, 꼬챙이 같은 삿대질과

- 특히 - 그 정직함에는,

마치 사막의 선지자 같은 굳센 단호함이 서려있었다.



“자기가 공주인 줄 아나 봐?! 아냐 넌! 절대!”

“으하하하!”



또 다른 어떤 여자 어린이는 5:5 가르마를 타고 있었다.

동그랗고 귀여운 두상은,

정 가운데의 또렷한 가르마 때문에,

마치 귀엽고 윤나는 호두처럼 보였다.



또 어떤 여아(女兒) 머리는

뒷머리를 양 갈래로 해서 댕기를 따고 있었는데,

이것은 흡사 오토바이 손잡이처럼 보였다.



여기 머리끈에는,

빨간 앵두나 하트 모양 장신구들이,

바짝 하니 매달려 있기도 했는데,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또 뭔가에 깜짝 놀라 옆으로 돌아설 때면,

이 플라스틱 장신구들이 아침햇살에 반짝거렸다.

  


하나로 기다란 댕기머리 여학우를 볼 때면,

자, 사자의 심장을 가진 남자 어린이들은

'와 저거 진짜 한 번 잡아당겨 보고 싶다'

라는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또 두 갈래로 머리를 딴 여자아이도 있었는데,

이런 머리를 볼 때도

두 개의 심장을 가진 남자아이들은 역시,

‘와 저거 진짜로 양손으로 잡아당겨 보고 싶다’

라는 또 다른 강력한 충동에 휩싸였다.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한 아이들은,

실제로 여자아이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고,

아이구야,

재빨리 계단을 두 칸씩 건너뛰어

운동장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피해를 당한 여자 어린이는,

당연히 화를 냈다.


  

“꺅! 아!”, “아~ 하지 마~!”

단순히 싫다는 표현만을

내비치는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야! 너 이를 꺼야!”

하지만 선생님께 이를 거라고

경고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런 경고에, 엄포에, 반응에, 자지러짐에,

장난을 치고 달아나던 남자아이는,

속도를 늦추고 뒷걸음을 치며

뒤돌아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안 했어~!”

당연히 먹히지도 않을 거짓말이었다.


  

“거짓말하지 마!”

“진짜야~!”



아이는

가벼운 뒷걸음질로

운동장 모래를 끌었다.



이 때문에

운동화 뒤축으로는

작은 먼지 구름이 일었다.



(2부 끝. 3부 계속)

작가의 이전글 제1장 1988년도 가을 아침조회 (1/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