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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poong Jun 05. 2023

제2장 소격동 세계의 중심 (2/4)

:: 할망구

상관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구리시 유치원 때 특이하다고 생각한 것 몇 개를 들려 주겠다. 먼저 동네 꼬마들을 내 반사거울로 놀릴 때다. 앞의 50원 형아들을 탓할 것도 없는 것이 나부터도 나보다 어린 꼬마 아이들을 골려먹고 있었다. 버려진 자동차 거울을 주워다가 동네 상가건물 그늘진 화장실 쪽으로 빛을 반사해 거울달을 만들고 동네 꼬마들에게 그 달을 잡으라고 시켰던 것이다. 꼬마들은 웃었다. 꼬마들은 작은 달을 잡겠다고 상가 벽면을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며 행복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착했기 때문에 -물론 뻥이다- 착했다기보다는 거울달이 너무나 빨리빨리 움직였기 때문에 계속 놀아 줄 수 없었다. 내 손의 작은 각도만으로도 그러니까 거울을 조금만 꺾어도 거울달이 너무 빨리 이쪽저쪽 이동해 움직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 상가 벽면에는 화장실 출입구가 있었고 안 쪽에는 화장실 거울이 있었는데 내가 거울을 보며 왼손을 들어 보이면 거울 속의 놈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내가 왼손을 움직이면 거울은 오른손을 움직였던 것인데, 나는 이것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내가 골려주던 꼬마 중에 내 동생이 있었는지는 영원토록 함구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또 특이한 일이 있었다. 그날은 내가 유치원 봉고차를 타고 집에 오는 길이었는데 친구들에게 재미있는 말을 하나 배운 터였다. 욕까지는 아닌 말이었는데 아무튼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말이었다. 그것은 “할아방구”라는 말이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할아버지를 ‘할아방구’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는데 듣자마자 나는 그 말이 굉장히 멋진 단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욕처럼 거친 것도 아니었고 '방구' 라는 말이 붙어 있으니 굉장히 재미있는 단어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 나이 20살 때 돌아가셨고 나는 아빠 나이 26살에 태어났다."할아방구라고? 그럼 할머니는?" 그러자 친구들은 “할망구”라는 말을 알려줬다. 할아방구와 달리 “망구”여서 조금 뭔가 맞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할머니”보다는 훨씬 강력한 뭔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걸 배워온 길이었다. 학생은 배워야 한다. 유치원생도 학생이다. 이론을 배웠으니 이제 적용이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내 두 눈을 봉고 창문에 붙이고 밖을 바라다보았다. 저쪽 저기 멀리서 마중 나온 할머니가 바라다 보였다. 우리 할머니. 반갑고 반가운 우리 할머니가 보였던 것이다. 나는 봉고 창문을 크게 열었다. 그러고는 거기다 대고 미친놈처럼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를 불렀던 것이다. 그렇다. 똑똑한 여러분들은 츙분히 예상했을 것이다.“할망구~!” 아이들은 웃고 나도 웃었다. “우리 할망구~! 야 신난다! 우리 할망구다!” 때는 저녁 직전이었고 내 목소리는 어스름을 가로질렀다. 한줄기의 목청이 조용한 동네를 가로질렀던 것이다. 석양의 무법자처럼 말이다. 물론 나는 충분히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등짝을 맞거나 엉덩이를 맞거나 하는 걸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봉고차에서 내리자 할머니는 내 손을 잡아끌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게도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이구 남이 흉봐.” 할머니는 나를 때리거나 뭐 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굉장히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이었다. 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남이 흉을 본다고? 그게 뭐지?’ 나는 이 말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왜 조용히 말하고 그래. 왜지.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나는 할머니를 할망구라고 부르지 않았다. 할매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그것은 누가 흉 볼까봐서가 아니라 그냥 그때의 조금 이상한 느낌을 상기시켰기 때문이었다. 남이 흉봐. 할머니는 타인의 이목에 의해 형성된 도덕률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전능한 절대자나 인류 보편의 양심 같은 추상적인 도덕률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제 사람들 하나하나의 시선과 이목을 의식하는 구체적인 도덕률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남이 흉을 본다고? 도대체 남이란 무엇인가. 친구들 아닌가. 내게 할아방구를 알려주고 내게 할망구를 알려주는 아이들 아닌가. 또 돌이켜 보자면 그들은 내게 오락실 뒤에 돈을 숨기라고 권하는 형들 아닌가. 대수롭지 않았다. 물론 나는 할머니에게 크게 혼나지는 않아서 나쁘지는 않았다. 별로 혼나지 않아서 나로서는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그때 할머니 태도의 뭔가가 나와 뭔가 조금 다르다고 생각되어 그것이 벌써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것으로 우리의 구리 시절은 끝나가게 되었다. 이제 봄방학이 끝나고 유치원 마지막 날 때였다. 유치원 선생님은 종이놀이 중에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유치원 선생님은 천사 선생님, 천사 선생님은 이렇게 물었다. 이제 곧 3월이고 여러분이 국민학교에 올라갈 텐데, 3월달은 어떤 계절이냐고 말이다. 우리 유치원생들은 봄/여름/가을/겨울을 배운다. 봄-여름-가을-겨울. 이런 순서로 말이다. 그리고 1월, 2월 이렇게 열두 달을 배운다. 12월달까지 말이다. 그럼 이 둘은 어떻게 짝을 맞춰야 할까. 봄부터 3개월을 나누어, 봄이 1~3월 달이고, 여름이 4~6월 달, 이런 식으로 맞춰야 할까. 하지만 1월달과 2월달은 아무래도 봄은 아니다. 상식적으로도 1~2월은 아무래도 겨울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통 크게 1~3월달이 겨울이고, 4~6달이 봄이고, 7~9달이 가을이고, 10~12달이 겨울이라고 생각해 두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3월달에 실제 눈을 본 적이 있었다. 내 나름의 어린 눈썰미가 있었던 것이다. 3월에도 눈이 내리곤 한다. 그럼 3월도 겨울 아닌가. 질문에는 재빠른 대답이 필요하다. 나는 가위를 얼른 내려놓고 손을 높이 들어 보였다. “겨울이요!” 3월달은 겨울이라고 하자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선생님도 “으음” 하셨다. 천사에 가까웠던 선생님도 ‘으음’ 하셨던 것이다. 내가 틀렸다는 투였다. 순간 부아가 솟아올라 나는 이렇게 따져 물었다. “3월달에도 눈이 왔어요! 봄에는 눈이 안 오잖아요!” 그러자 아이들이 다시 “으하하하” 웃었다. 멍청한 웃음이었다. “3월달에 눈이 온대~!" 어떤 멍청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무도 당당한 그 소리에 잠시 생각했지만 3월달에도 실제로 눈이 오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경기도 외곽 지역 도로에는 눈이 내려 지저분한 검은 눈들이 도로 측에 밀려서 쌓여 있던 이미지를 말이다. 경기도 도로 눈에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나무는 왜소하고 길가의 누런 잡초는 눈더미 속에 삐져나와 있고 자동차는 빛바랜 원색에 우당탕탕 소리를 내고 말이다. 진정 3월달에도 눈 풍경을 그렸다. 그러니까 그 멍청한 놈이 당당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멍청한 놈을 언젠가 나중에 한대 콕 때려줘야 했지만, 이제 국민학생으로 올라가야 할 터였다. 그날이 유치원 마지막 수업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런 것이다. 남이 흉을 본다? 그래봐야 그놈들은 3월달에 눈이 오는 것도 모르는 멍청한 놈들 아닌가. ‘조용히 혀, 남이 흉봐.’ 그것은 그저 남일뿐이지 않는가. 말인즉 내 말은 남이 흉을 본다는 말은 이상한 말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기는 하다. 그래도 남이라는 것, 그리고 흉이라는 것, 그러니까 타인이 욕을 한다는 것, 여기에는 이물감이 남아 감돈다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다. 그것은 인정한다. 아무튼 그래서 대체 언제부터 봄이고 겨울일까.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날짜와 계절을 짝을 맞춰 누가 정확히 가위로 오려줬으면 좋겠다. 그건 그렇게 됐고, 이렇게 해서 아버지는 소격동에 전셋집을 얻게 되었다. 그 길로 서울 생활,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서울, 즉 종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종로만이 진정한 의미의 서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종로만이 서울인 것이고, 다른 곳은 강남을 포함해 모두 공평하게 지방인 것이다. 그리고 말을 못 했는데, 앞에서 말한 절도 사건이 주원인이기는 했지만 소격동으로 우리가 이사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엄마에게는 비염에 축농증이 있었던 것이다. 감기는 비염으로 이어진 다음 심해지면서 축농증으로 발전하게 된다. “뿌앙~!” 엄마는 종종 코를 풀면서 빵빠레를 울렸다. 참고로 축농증은 광대뼈 속 안으로 농이 차는 질환으로 단백질 부족이 그 원인 중 하나다. 아무튼 엄마 축농증의 원인이 탁한 공기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지도를 펴고 가장 녹색이 많은 곳을 찾았다. 그렇게 찾은 곳이 바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서울, 세계의 중심 종로였다. '녹색! 여기다!' 아버지는 지도를 펼치고 손가락으로 종로의 삼청공원을 짚었다. 주변은 온통 녹색, 녹색이 창궐하는 별다른 신세계였다. 그곳은 서울이었지만 서울 같지 않으면서도 가장 서울 같은 곳이었다. 아버지는 바로 종로 복덕방에 전화를 걸었다. 집값은 굉장히 싼 편이었다. 청와대 옆이라 개발 제한이 걸려있어 일종의 낙후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옥 보존지역은 이러한 개발 제한과 낙후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아무튼 그것으로 우리 가족은 종로 소격동에 입성하게 된다. 주소는 소격동 112번지 단층 양옥이었다. 그 단층 양옥에는 3가구가 함께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우리 집과 경찰 아저씨네 집, 그리고 이발사 아저씨네 집이 한 지붕 아래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전세를 통해 방 두 개를 얻은 우리가 중간에 남은 방 하나를 짧게 다시 월세(貰)를 놨을 때도 있었으니, 한때는 한 지붕 아래에 4식구가 살았던 때도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세줬던 집은 할머니와 아주머니는 있었지만 아저씨는 없었다. 아저씨가 사업을 하다가 감옥 같은 곳에 가신 것 같았고 사정이 어려워져서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것으로 보였는데 물론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었다. 이 집은 나갈 때는 돈이 없다며 월세 대신 값비싼 비단 이불을 주고 떠난다. "원래 부자인가 봐요(뵈)." 엄마와 할머니 둘이 동시에 말했다. 서로를 바라보면서였다. 그리고서는 그런 거 같다는 뜻으로 두 분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지붕의 한 가족 중에는 이발사 아저씨가 있었다. 이발사 아주머니는, 아저씨의 이발일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 때 아저씨가 일주일에 한 번씩 청와대로 들어가서 대통령 머리를 이발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발할 것이 과연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일주일에 한 번은 너무 과소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집 이발사네 아저씨는 낚시를 좋아했는데 글쎄 이것이 아주머니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 토요일마다 낚시를 떠났다고 했는데, 이게 아주머니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이발사네 아주머니는 아침마다 도시락을 거하게 쌌다. 점심 식사와 저녁식사를 모두 싸야 했는데다가 이발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도시락까지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이발사 아저씨네는 형제가 4명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모두 이발사로 이 중 우리 집 이발사 아저씨는 4형제 중에 둘째였다. 이 이발사 형제 중 첫째 큰 형은 삼청동에 커다란 집을 가지고 있었다. 이발 일이 무척 잘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첫째 집의 아주머니가 가끔씩 소격동에 놀러와 엄마와 안면이 있었다. 이 첫째 형네 집에는 딸 둘과 아들 하나가 있었고, 그중 아들은 내 동생과 같은 반이었던 적도 있었는데, 이 집 아들은 키가 커서 나중에 농구를 했다. 엄마는 운동은 돈이 많이 든다는 취지로 그 아들의 농구화 하나가 30만 원이나 된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로는 굉장한 거금이었기에 잘 믿기지 않았고, 지금도 잘 믿기지는 않는데, 사실은 운동화와 농구공, 그리고 농구복과 무릎 보호대까지, 이른바 농구 장비 전부 합한 게 30만 원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의문인데, 여전히 저 멀리 인왕산 노을 너머 의문으로 남겨 둔다. 나중에 이 집은 농구를 잘하는 국민학교 쪽으로 이사를 간다. 소격동 전셋집 철문을 열어젖히면, 왼쪽은 이발사 아저씨 댁이었고, 오른쪽은 경찰 아저씨네였다. 우리 집, 그러니까 우리 방은 시멘트 마당을 지나 맞은편 반대쪽이었다. “엄마! 나 왔어!” 나는 시멘트 마당을 가로 질러 어딘가로 쳐들어가듯 씩씩하게 미닫이문을 열어 재꼈다. 그리고 가방을 문안으로 던져둔 다음 방안으로 들어서면서 다리를 떨어 신을 벗었다. “엄마! 짜파게티!” 나는 받아쓰기를 하고 온 터였다.





(2부 끝. 3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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